재미자주사상연구소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강선의 노을
김현환 소장 | 2010/01/02 13:57

[작성 :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나는 남포 갑문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갔던 평안남도 천리마군에 있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옛날의 강선제강소)를 이번에(2009 1121) 비로소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천리마의 고향, 자력갱생의 고향을 처음 방문하는 나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더구나 지난해 2008 10월에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하여 또 하나의 자력갱생의 모범을 창조한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의 소식을 듣고 감명을 받고 있던 차였기에 더욱 마음이 설렜다.

내가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에 들어서자 3분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정말로 만나고 싶었던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한 노력영웅이며 박사인 리재경 연구사(71)와 부사장 그리고 해설강사 선생 3분이었다. 리재경 박사가 직접 나를 안내하며 기업소의 여기저기를 보여주며 해설해 주었다. 나는 그의 해설을 직접 들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강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자세한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어도 그가 강조하는 자력갱생의 정신,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의 불굴의 의지와 단결력, 그리고 그들의 최고 지도자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 그에 보답하려는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의 충성심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 자체였다.

그의 해설에 의하면 천리마기업소는 처음에 초고석 전기로를 이탈이아에서 수입하려고 했다고 한다. 2 5000만불을 처음에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압력으로 이탈리아의 회사는 값을 계속 올리다가 결국에는 계약을 파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김정일 위원장은 가슴 아파하면서 강선제강소를 현대화 하려면 초고속 전기로를 수입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자체기술로 만들어 내던지 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그는 강선제강소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강선의 노을]이라는 시를 보내주었다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선의 노을

1.노을은 아침저녁 피고지건만

강선의 붉은 노을 언제나 피네.

------어버이 그 사랑

하늘 땅 끝까지 넘쳐 흐르네.

2.만경대 고향집을 곁에 두시고

강선의 로동계급 먼저 찾아주셨네.

-----그날의 그 사랑

아름다운 노을목에 어리어 오네.

3.충성의 마음 담아 끓는 쇠물은

수령님 사랑 속에 노을로 피네.

------어버이 그 사랑

주체시대 노을 속에 영원하리라.

△조선화 ´강선의 저녁노을´ 정영만 인민예술가 작

이 시를 받아 안은 강선의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은 모두 부등켜 안고 울었다 한다. 최고지도자께서 자기들을 믿어주는 그 고마움에 모두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들 강선의 노동계급들과 기술자들은 주석님께서 직접 자신들에게 전후 복구시절에 신심을 불어 넣어주시던 그 음성을 다시 들으며 지금 다시 어서 속히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어 인민경제를 한층 더 발전시키라는 우렁찬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초고속 전기로의 총설계를 맡은 기술자 리재경 선생을 비롯한 과학자들, 기술자들은 <강선의 노을>이라는 시 속에서 울려 나오는 주석님의 우렁찬 음성을 생생하게 들었으며 이 시를 보내준 최고지도자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지혜를 짜내었다고 한다.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의존해 왔던 외국식 사고방식을 버리고 <우리 식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자고 결심하고 설계를 처음부터 새롭게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4개월 만에 우리식의 초고속 전기로를 마침내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어 내자 마자 생산에 들어갔다. 전에 같으면 1년에 걸려 생산할 강철의 양을 1달 만에 생산해내고 전력소모도 1/7로 줄었다 한다. 리재경 박사는 <막상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하고 보니 원리가 어려운 것도 아니더라고요.> 하면서 껄껄 웃었다. 나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라고 칭찬했다. 물론 처음에 리재경 박사와 연구진들이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했을 때는 모든 게 완벽하지가 못했다 한다. 그 후도 김책공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의 두뇌들이 계속 강철생산의 시간을 줄이고 전력소비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여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자체의 과학지식과 기술, 자체의 자재로 또 하나의 <자력갱생>의 모범을 창조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은 과학시대에 또 하나의 천리마운동의 시작이었다.

리재경 박사와 다른 안내자들은 기업소를 다 돌아본 후 나를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였다.

리재경 박사는 조용하게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외국에 사시면서 우리나라의 자립경제에 대하여 다는 모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존경하는 최고지도자의 인간중심의 위대한 영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려는 단결된 노동계급과 과학자들, 기술자들 대군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력갱생에 기초한 자립경제는 든든합니다. 다른 분들도 모시고 우리 강선을 자주 찾아주십시요.

나는

“천리마의 고향이며 자력갱생의 고향인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방문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기업소의 무궁한 발전을 바랍니다.

앞으로 다른 재미동포들을 모시고 계속 방문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들과 작별하였다.

나는 리재경 박사가 강선의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연구한 강선공장대학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이북의 교육제도의 위대성을 새삼 재고하게 되었다. 군대에서나 공장에서나 농촌에서나 광산에서나 자기만 능력있으면 다 공부할 수 있고 생산현장에서 뛰어난 인재가 발견되면 언제고 대학으로 추천되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이북의 교육제도와 사회제도가 나는 사실상 부러웠다. 각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이나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 나이에 상관없이 이과대학이나 김책공대로 보내져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여 이십대 박사들이 계속 배출되게 하는 이북의 교육제도가 오늘날 어떤 결실을 가져왔는가? 사실상 앞에서 견학한 강선의 초고속 전기로 완성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현대과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위성발사를 자체의 과학기술과 자체의 자재로 두번이나 발사하여 성공한 일이라든가 핵실험도 두 번이나 성공한 비결은 결국 이북의 주체교육의 결실이 아니었던가! 제국주의의 압력으로 다른 발전된 나라들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를 쳐다보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첨단과학들을 배워 스스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며 오히려 선진국들보다 앞서나가는 이북의 자력갱생의 과학자들, 기술자들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세계 최강의 미국이 조그마한 나라인 이북과 사실상 전쟁을 포기하고 대화로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그마한 나라인 이북이 세계앞에서 유엔안보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유엔개혁을 외치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천리마의 고향, 자력갱생의 고향인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떠나면서 내가 코리안이라는 민족적 긍지감을 다시 새삼 느끼게 되었다.()


트랙백0 | 댓글0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
김현환 소장 | 2009/11/02 07:01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인류 사상사의 첫 시기에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해명하기 위하여 부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세계인가 하는 문제였다. 참으로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인류의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살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 <세계관>은 바로 우리의 <인생관> <사회역사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고 언론 출판 사업이 활발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세계를 신비스럽게 보았다. 옛날 사람들이 사는 곳 마다 신의 이름은 달랐어도 그들은 신을 믿었고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5,000년 전에 생겨난 고등종교들도 신이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결국 인류는 오래 동안 시원의 견지에서,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 졌느냐, <의식>, <정신>으로 이루어 졌느냐, <물질>로 이루어 졌느냐 하는 견지에서 세계를 관찰해 왔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대국이라는 미국도 기독교 국가로 자처하면서 모든 국가행사가 기독교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돈, 달러에도 In God We Trust(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씌어져 있다. 미국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결국 시원의 견지에서 세계는 신이 창조했으며 신이 세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장 과학적인 미국도 관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조국 남반부를 보면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여년 만에 기독교의 총인구가 1,000만을 넘어섰다고 하니 기독교의 신이 인간을 비롯한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는 관념론자들이 총인구의 4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는 통계이다. 여기다 신을 믿는 다른 종교인들의 수를 합하면 아마 관념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총인구의 반은 넘지 않나 생각된다.

한편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우리 조국의 북반부는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물질로 스스로 존재했으며 인간마저도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라고 믿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이북의 주민들 대부분은 신을 믿고 있지 않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처럼 세계를 시원의 견지에서 신, 정신, 의식으로 볼 것이냐, 물질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미개한 원시시대부터 첨단과학기술이 발달된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토론되어 왔다. 여기서 그동안 철학사에서 사용되어 온 철학적 용어들을 빌려 이 세계관과 연관된 문제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유물론, 관념론, 변증법, 형이상학

그 동안 철학사에서는 오래 동안 유물론과 관념론이 논쟁을 벌려 왔고 또한 변증법과 형이상학이 논쟁을 벌려 왔다. <유물론>이란 세계의 물질성을 인정하는 학설, 의식(정신)에 대해서 물질이 일차라고 주장하는 철학학설이다. <관념론>이란 이와는 반대로 세계는 본질에서 관념이요, 정신이라고 보는 철학학설이다. <변증법>이란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고 보는 철학학설이다. <형이상학>이란 이와는 반대로 세계란 본질상 변화발전하지 않고 기껏해야 순환운동을 한다고 믿는 철학학설이다.

이 두 진영의 논쟁이 오래 동안 계속되어 오다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에 의해서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극복이 이루어졌고,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의해서 형이상학에 대한 변증법의 극복이 이루어졌다고 철학사는 지적하고 있다. 즉 유물론에 의해서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증되었고, 또 세계가 형이상학이 주장하듯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증법의 주장처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해명되었다. 이것은 세계를 물질로 보는 유물론이 관념론에 대해서 승리하고, 세계의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발전하고 부단히 운동한다고 보는 변증법이 형이상학에 대해서 승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위에서 이미 지적한대로 아직도 많은 나라들에서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조류들과 종교 사상들이 존재하지만 총체적으로 <세계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부단히 운동,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 일반적 상식으로 되었다. 따라서 세계의 시원문제, 세계가 물질이냐, 의식(정신)이냐, 또 세계가 변화 발전하느냐, 변화발전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들을 둘러싼 유물론과 관념론의 논쟁, 또 변증법과 형이상학의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일단 결론 내려 졌다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오래 동안 인류의 생각 속에는 유물론과 변증법은 과학적인 철학이요, 관념론과 형이상학은 비과학적인 철학이라는 고정된 관념이 정착되었다. 또한 이 유물변증법과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철학에서 진보성과 반동성의 기본척도로도 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 왔다. 이 대립적인 양자를 철학에서 진보성과 반동성의 기준으로 보게 된 것은 역사발전에서 선진적 계급은 언제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보며 반동적 계급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현존체제를 유지보존하기 위하여 현실적 여러 관계와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을 왜곡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이론적 분석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철학의 당파성은 벌써 인식론의 문제를 초월하고 있다. 즉 과학적인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자주성의 실현을 억제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철학,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설교하는 철학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실용주의철학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신을 믿는 비과학적인 관념론적인 종교철학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민중 신학과 해방신학이 그 좋은 예이다. 이것은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문제를 전제로 그것을 자체 속에 포섭하면서도 더 고차원적인 문제에 의해서만 철학의 당파성, 진보성과 반동성이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철학 자체가 창조적 성격을 가진 철학이기 때문에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철학도 끊임없이 변화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난 시대와는 다르게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세계의 무대에 주인으로 등장한 새로운 시대이고 민중의 자주적, 창조적, 의식적 활동에 의해서 역사가 개척되어 나가는 아주 새로운 시대, <자주시대>이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생산력이 급속히 발전되어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의 영역이 급속히 확장되어 나가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조절, 통제능력도 비상히 커졌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을 제쳐 놓고, <인간>이라는 요인을 하나의 독립적인 요인으로가 아니라 그 요인 자체를 <물질과 의식>으로 갈라놓고, <육체와 정신>으로 갈라놓고서는 인간의 주인 된 지위에서 인간의 역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우리 시대의 여러 현상들, 과정들, 사건들에 관하여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유물론철학도 더욱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철학으로 발전해야 된다는 것이 이 시대의 필연적 요구로 나서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유물론이란 <세계의 시원이 무엇이냐>하는 견지에서 세계의 본질을 해석한 것이었다. <세계의 시원이 물질이다>라는 데로부터 <물질>을 세계의 시원의 위치에 놓고 세계의 본질을 밝힌 것이 지금까지의 유물론이었다. 그러나 세계가 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조건에서는 어떻게 해야 유물론철학도 더욱 더 발전해 나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나서게 되었다. 세계가 물질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조건에서 유물론을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려면 바로 세계의 시원이 무엇이냐 하는 견지에서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 했던 <철학의 근본문제>부터 혁신해야 한다.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

그러니까 세계의 시원의 문제가 해결된 조건에서 세계의 시원의 문제를 근본문제로 했던 철학의 발전단계로부터 보다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근본문제> 자체도 새롭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여기서 <철학의 근본문제>란 철학의 다른 모든 문제를 푸는 데서 사상 이론적 및 방법론적 기초로 되는 문제를 말한다. 즉 철학의 성격과 내용, 근본특징을 규정하는 문제를 말한다.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마르크스주의철학은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문제>가 세계의 시원을 밝히는 문제로서 그 해명이 세계관을 세우는 데서 이론적 출발점으로 되고 물질과 의식의 범주가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범주이며 따라서 그 상호관계는 세계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일반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이 유물론과 관념론을 가르는 기준으로도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의해서 세계가 물질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조건에서, 즉 세계의 시원문제가 해결된 조건에서 <그러면 이 물질세계에서 누가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결정적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로 내세워야 한다. 이 문제에 해답을 주는 원리가 새로이 발전된 유물론의 근본원리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은 바로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사상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문제>라고 표현할 때는 이 관계문제를 어디까지나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로 추상한 것이다.

사실상 인간이 현실세계와 맺는 관계는 매우 다양하다. 인간은 주위의 현실세계와 정치적 관계, 경제적 관계, 문화적 관계, 도덕적 관계, 미학적 관계, 사상적 관계, 인식적 관계, 실천적 관계, 가치적 관계 등 수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 주체사상이 <철학의 근본문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라고 표현할 때 위에 말한 모든 복잡한 관계를 다 철학의 근본문제로 본다는 의미인가? 그런 뜻이 아니다. 주체사상은 인간과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들을 다 <지위와 역할>이라는 문제로 과학적으로 추상했다. 현실세계와 맺고 있는 인간의 이론적 관계에서나, 실천적 관계에서나, 가치적 관계에서나 인간의 <지위>가 어떠한가, 인간의 <역할>이 어떠한가, 이러한 관계들에서 인간이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는가 못하는가, 이러한 관계들을 인간이 <개조하는 역할>을 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와 맺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든 다양한 관계를 <인간의 지위와 역할>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적으로 추상한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이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는 결코 단순히 <인간문제>, <인생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라는 점이다. 다시 풀어 말하면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냐, 아니면 주위 세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주인이냐, 또한 인간이 세계를 개조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세계가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가 왜 철학의 근본문제로 될 수 있는가?

첫째로,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의 문제>가 세계관의 사상 이론적 및 방법론적 기초로 되기 때문이다. 사상적 기초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간의 근본 요구와 이해관계는 세계의 지배자, 개조자 그리고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어 자기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려는 데서 표현되며, 이론적 기초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이며 일반적인 관계가 <세계와 인간의 관계문제>이며 그것에 의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이 과학적으로 해명된다는 것이다. 방법론적 기초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계를 누구의 이익의 견지에서 보는가, 무엇을 기본으로 하여 세계의 변화발전에 대하는가 하는 것은 세계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주동적 역할을 하는 것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달려 있다.

둘째로, 그것은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힐 수 있게 설정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올바로 규명할 때 인간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냐, 아니면 외적인 힘에 종속되어 있느냐, 인간이 자기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그 철학의 진보성과 반동성도 명백히 규정될 수 있다.

주체사상이 유물론을 새롭게 발전시킨 내용

이처럼 주체사상이 내세운 새로운 철학의 근본문제는 결코 지금까지 오래 동안 유물론과 관념론이 논쟁을 벌려온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철학도 더욱 새롭게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면 주체사상이 유물론철학을 새롭게 발전시킨 주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첫째로, 주체사상은 <물질의 개념>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물질개념>은 유물론철학의 출발범주, 출발개념이다. <물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유물론과 관념론이 갈라진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이라는 책에서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주어져 있으며 그것에 의하여 복사되고 모사되고 촬영되는 객관적 실체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즉 레닌은 <물질>을 인간의 의식밖에 그것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로 보았다. 이 레닌의 물질에 대한 정의는 철학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보지 않고 관념의 세계로 보는 관념론자들이 <물질>을 관념의 산물로, 정신의 산물로, 이념의 산물로 보았는데 그러한 관념론적 이해를 극복하는 데서는 레닌의 물질에 대한 정의가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이 정의는 지금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물질에 대한 레닌의 정의를 깊이 있게 분석해 보면 이 정의가 더 발전되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질을 <객관적 실체>로 볼 때 이 <객관적 실체성>이라는 정의는 물질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물질발전의 <각이한 형태>에 따라서 변화되는 성질이 아니라, 그것은 물질의 어떠한 역사적 발전단계나 물질의 어떤 형태에 상관없이 다같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 속성>이다. 이 레닌의 물질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무기물질이나, 생명물질이나,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이나 모두 <객관적 실체>라는 면에서는 다 공통적이다. 물질의 역사적 발전이 어떠했든지 간에 <객관적 실체성>은 어디서나 같다. 그러므로 이 물질에 대한 철학적 개념이 더욱 더 발전하려면 그 개념을 가지고 물질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물질의 각이한 형태를 분석할 수 있는 인식론적 기능과 방법론적 역할이 더 높은 개념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이 물질의 개념이 물질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성질, 측면, 계기를 <물질>이라는 개념의 징표 속에 담아야 한다. 레닌의 물질개념은 바로 물질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부단히 발전하는 속성, 측면, 계기들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

다음으로 물질이란 유물론철학의 출발개념이기 때문에 유물론과 변증법이 참답게 결합되려면 이 유물론철학의 출발개념인 <물질개념>과 변증법철학의 출발개념인 <운동개념>이 결합되어야 한다. 지난 시기 <객관적 실체성>을 물질의 유일한 징표로 보는 물질개념은 운동개념과 결합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물질개념이 참으로 유물론적 개념과 동시에 참으로 변증법적 개념으로 되려면 물질개념이 더욱 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심화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지난 시기의 물질개념은 가장 발전된 물질인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속성들을 직접 염두에 두지 않고 주로 저급한 물질에 있는 속성들을 염두에 두면서 물질개념을 연구하였다. 인간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이 인간에게서 물질의 본질적 특성이 가장 전형적으로,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물질개념도 더욱 더 완성되려면 물질의 특성이 가장 성숙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이라는 고급한 물질적 존재를 깊이 있게 분석하여 정의를 내려야 한다.

주체사상은 이러한 위에 지적한 요인들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물질>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정의를 내렸다.

“어떠한 물질이나 다 일정한 구조와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속성에 따라 운동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정식화라고 볼 수 있다.

각이한 물질발전의 단계, 또 물질의 각이한 형태들이 <객관적 실체성>의 면에서는 다 같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작용의 면, 운동에서는 다 차이를 가진다. 외부세계에 얼마나 주동적으로 작용하느냐, 그 운동이 얼마나 고급하고 복잡한 운동이냐 하는 데서는 물질형태나 물질발전의 단계마다 다 다르다. 무기물질이나 생명물질은 외부세계에 대한 주동적 작용, 능동적 운동의 특성으로 볼 때 단순성, 저급성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 이르면 외부세계에 대한 주동적이며 능동적인 작용이 고도로 발전한다. 인간은 무기물질이나 생명물질에 비해서 가장 복잡하고 고급한 운동, <사회적 운동>을 한다. 그러니까 물질이 낮은 단계로 부터 높은 단계로 발전할수록 외부세계에 대한 능동적 작용, 주동적 작용이 더욱 더 강화되고 보다 고급하고 복잡한 운동을 한다.

그러면 외부세계에 대한 물질의 각이한 형태들의 작용의 주동성과 능동성, 운동의 고급하고 복잡한 성격은 무엇에 의해 규제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물질의 속성>에 의해서 규제된다. 생명물질이 외부세계에 순응, 적응하는 활동을 하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속성>때문이다. 생물학적 생명은 개체를 보존하고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환경에 더 잘 순응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물질의 <개체 보존과 종 보존의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자주성> <창조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가장 복잡하고 고급한 운동을 한다.

그러면 이러한 <속성>은 무엇에 의해 규제되느냐?

그것은 바로 그 사물의 <구조>에 의해서 규정된다. 모든 사물은 다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각 사물은 일정한 방식으로 일정한 구성요소들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 <구성요소들의 결합방식>이 바로 <구조>이다. 바로 이 구조에 의해서 모든 사물의 <고유한 속성>이 나오고 이 속성에 따라서 각 사물은 그 속성의 특성에 맞게 <운동>한다. 전기적 속성을 가진 물질은 전기적 운동을 하고, 자기적 속성을 가진 물질은 자기적 운동을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는 그것의 구조 자체, 사회관계 자체, 사회의 정치적 관계, 경제적 관계 자체로부터 제국주의는 다른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약탈, 침략을 일삼는 근본속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제국주의는 침략전쟁, 약탈 전쟁이라는 행동을 벌리게 된다. 한편 사회주의는 사회적 구조, 즉 사회의 정치관계, 경제관계 자체로부터 사회주의는 상호 협조하고 협력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대외활동에서도 자주, 친선, 평화의 정책을 쓰게 된다.

이처럼 어떠한 물질의 형태에서나 일정한 <구조> <속성>이 있고 그 <속성>에 따라서 <운동>이 진행된다. 그리고 물질이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구조가 더욱 더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덜 유기적인 것으로부터 보다 더 유기적인 구조로 변한다. 이에 따라서 속성도 단순한 속성으로부터 보다 복잡한 속성으로, 저급한 속성으로부터 보다 고급한 속성으로 발전한다. 그에 따라서 운동도 단순하고 저급한 운동으로부터 복잡하고 고급한 운동으로 발전한다. 그러니까 사물의 <구조>, <속성>, <운동>, 이 세 가지 징표는 물질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더욱 더 발전된다. 이러한 요인들을 고려하여 위에 지적한 주체사상의 물질개념이 정립되었다.

이처럼 주체사상의 물질개념은 <물질>이라는 개념을 변증법의 기초개념인 <운동>이라는 개념과 결합시켰다. 또한 주체사상의 물질개념은 가장 고급하고 발전된 존재인 인간의 속성, 성질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왜 인간만이 외부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을 하느냐? 왜 사람만이 환경에 단순히 순응만 하지 않고 환경자체를 자기에게 복종시켜 나가느냐?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주성과 창조성이라는 가장 발전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체사상은 밝혀주었다.

그러면 왜 인간만이 <자주성> <창조성>을 가지는가?

인간 아래의 단계에서는 자주성과 창조성을 낳을 수 있는 그러한 <구조>, 그러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구조를 갖고 있고 <사회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사회관계와 다른 생명물질들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외부세계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동물적 존재와 차이가 없게 된다. 인간집단은 동물처럼 자연이 주는 것만을 섭취하는 것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부득불 환경을 개조해야 한다. 그래야 가장 발전된 물질에 상응한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집단의 <사회관계> 자체가 자주적 특성, <자주성>과 창조적 특성, <창조성>을 가지게 된다. 동물이 <생물학적 본능>에 의해서 행동이 규정된다면 인간은 <사회적 요구> <이해관계>에 의해서 행동이 규정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인간의 <의식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집단 속에서 맺어지는 이러한 <구조> 자체로부터 인간 이하의 동물들의 구조와는 질적으로 다른 구조, <사회적 구조>가 생겨나며, 이러한 사회적 구조로부터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사상의 새로운 시각에 기초해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의 <속성> <운동>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주체사상이 변증법을 새롭게 발전시킨 내용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은 물질의 <발전수준>, <발전형태>에는 관계없이 모든 사물에 공통한 <운동발전의 일반적 특성>을 해명하는데 머물렀다. 따라서 지난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을 가지고는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한 운동의 특성을 밝힐 수 없었다. 주체사상은 처음으로 인간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운동>을 한다고 밝혔다. 가장 고급한 물질인 인간의 발전된 운동이 바로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운동이라는 명제를 주체사상이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물질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다음으로, 세계의 변화발전이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주체사상은 밝혔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은 인간도 하나의 물질운동의 한 형태로 보는데 머물렀기 때문에 그것은 세계의 발전에서 인간이 노는 역할에 관한 문제를 특수한 철학적 문제로 내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가 이 세상에 나타난 후 인간이 점차 세계의 발전을 자기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발전을 주관하는 <주체>의 문제가 나서게 되었다. 지금 자연 그 자체에 의한 자연발생적 변화보다도 인간의 주동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에 의한 자연의 변화비중이 더욱 더 높아져 가는 추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사상은 세계가 <인간을 중심>으로 개조 발전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난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은 <주체가 없는 변증법>이었다. 한편 주체사상이 밝힌 변증법은 <주체가 있는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주체사상은 주체가 있는 변증법, 즉 사람의 목적의식적인 역할에 의해 변화 발전하는 변증법까지 밝혀줌으로써 변증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었다.

또한 주체사상은 세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겠는가 하는 문제에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즉 주체사상은 인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세계발전의 방향과 양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모든 사물이 다 자체의 원인에 의해서 변화발전하기 때문에 <세계의 통일적 발전방향>이라는 문제가 올바로 설 수가 없었다. 주체사상은 인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세계의 발전이 더욱 더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밝혀주었다.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해 나가는 방향으로 세계가 발전해 나가는 것이 세계발전의 방향이다. 그러면 어떠한 양상을 띠고 세계가 발전되어 나가는가? 세계의 발전은 더욱 더 넓은 세계의 영역이 보다 빠른 속도로 인간의 지배와 통제 밑에 들어오는 그러한 양상을 띠고 이루어지고 있다.

<의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

또한 주체사상은 <의식>에 대한 이론도 새롭게 심화시켜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철학은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식>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의식> <물질의 반영, 즉 객관세계의 반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의식의 본질을 물질세계, 즉 객관세계에서 찾았다. 이 경우 의식의 원천은 물질세계, 즉 객관세계에 있다. 물론 이 이론은 <의식>을 신비화하고 의식의 물질적 기초를 부정하고, 의식을 절대화하는 <관념론>을 반대하는 데서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선 의식이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동물들도 감각, 지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개념과 판단, 추리라는 것을 동물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동물의 감각, 지각은 의식발전의 낮은 단계를 표현할 뿐이다. <의식>이라고 말할 때는 감각으로 출발해서 개념, 판단, 추리에 이르기까지 전일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의 본질은 마땅히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의식의 본질을 논해야 의식에 대한 보다 높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강조하듯 객관세계를 정확히 반영해 가지고 객관세계의 특성에 맞게 활동해야만 행동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객관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행동의 성과를 거두기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된다.

그런데 인간은 객관세계의 법칙대로 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객관세계의 법칙의 작용도 자기에게 복종시키겠는가 하는 견지에서 활동한다. 인간은 객관세계를 복종시키기 위하여 객관세계를 자기의 요구에 맞게 개조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활동에서 <의식>이 노는 역할의 견지에서 볼 때 <의식>이라는 현상을 단순히 <객관세계를 복사, 모사, 촬영하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의식의 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요구> <이해관계>에 맞도록 활동한다. 인간은 객관세계가 하라는 대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요구와 이해관계에 맞게 객관세계를 자기에게 복무시키기 위하여 활동한다. 이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고 지휘하는 것이 의식이다. 따라서 의식의 본질을 올바로 밝히자면 인간과의 관계에서 의식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객관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복사해서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맞게 두뇌 속에 들어 온 형상도 개작하고 변형하여 앞으로 자기의 행동의 결과를 미리 예상하면서 행동의 목적을 세워 활동한다. 따라서 의식의 본질을 역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주체사상은 의식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내리고 있다.

“의식이 물질세계의 반영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의식의 본질을 거기서 찾는 것은 일면적이다. 의식의 본질은 객관세계의 반영이라는 데서보다도 <인간생명의 중심인 뇌수가 인간의 활동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외부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기초해서 외부세계에 대하여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의식이라는 것은 주체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활동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란 인간의 속성이다. 따라서 의식의 본질을 <객관세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에서 찾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듯 의식의 본질을 <객관세계의 반영>이라는 데서 찾는다면 그 본질이 객관세계에 있는 것으로 된다. 물론 의식이 객관세계의 반영이라는 것은 의식의 한 측면을 말해주며 그 자체는 진리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반영론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의 본질을 거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활동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뇌수의 기능>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의식에 대한 이해가 인간을 중심으로 더욱 더 발전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주체사상에서는 의식을 <사물의 본질과 합법칙성을 반영한 의식형태>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식형태>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를 <지식>이라고 말하고, 후자를 <사상의식>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주체사상에서는 의식을 <지식으로서의 의식> <사상의식으로서의 의식>, 두 가지 의식형태로 구별하여 쓰고 있다. 이처럼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도 주체철학은 과학적인 해답을 주었다.

이와 같이 주체사상은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명시한데 기초하여 인간을 위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사물현상들의 공통성>을 밝히고 그에 기초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를 밝힌 유물변증법적 이해와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이것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혀야 할 세계관의 사명에 맞게 세계에 대한 견해가 밝혀졌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도 바로 이것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앞에서 다룬 세계에 대한 유물변증법적 견해를 발전시킨 내용들은 <주체적 세계관>의 기본내용을 이룰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이미 강조했듯이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해명하고 인간을 위주로 하여 인간에 의한 세계의 지배와 개조발전의 합법칙성을 밝힌 바로 여기에 세계에 대한 주체적 견해의 주되는 내용이 있으며 독창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시대의 발전은 세계관의 발전을 동반한다.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회변혁운동의 끊임없는 확대발전은 이제까지 역사의 대상으로 취급되어 온 근로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한 새로운 시대, <자주시대>를 탄생시켰다. 근로민중이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역량으로 등장한 새 시대인 <자주시대>는 그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개척하며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역사적 사명을 승리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요구하였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던 시기의 시대적 요청은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설교하던 <반동적 세계관>을 타파하고 자본주의의 멸망의 불가피성과 사회주의의 승리의 필연성을 신념으로 심어줄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봉건의 잔재이면서 지배계급에 의해 악용되고 있던 <신중심의 세계관> <절대이념>을 내세우는 <객관적 관념론적 세계관>과 고립된 <자아>를 내세우는 <주관 관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유물변증법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앞에서 이미 길게 밝혔듯이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명을 토대로 하여 그 토대 위에서만 정립될 수 있었다. 물질-의식문제의 과학적 해결위에서 역사발전의 주재자는 <> <절대이념> <자아>도 아니라 물질의 <생산양식>이며 역사는 생산양식의 교체의 역사이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점유의 사적 성격간의 모순,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하여 자연사적으로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의식>이 객관적 필연성을 반영할 뿐 아니라 객관세계를 정확히 반영한 의식은 거기에 능동적으로 반작용한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이러한 이론이 민중에게 파악되면 거대한 물리적 힘으로 변화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를 기본 틀로 하여 전개되고 물질적 생산양식을 역사의 주재자로 본 마르크스주의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대로 나아갈 수 없었으며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해명할 수가 없었다. 민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역사와 자기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새 시대, <자주시대>의 요청은 위에서 길게 설명했듯이 <세계와 인간의 관계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명에 기초하여서만 해결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체사상에 의하여 세계에 대한 주체적 관점과 입장이 확립됨으로써 세계관의 구성체계가 올바로 밝혀지고 세계관이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히는 자기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히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세계관의 시각에서 볼 때 세계관은 마땅히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해야 한다. 즉 사회적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인간의 <자주적 요구와 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사물을 보고 평가하며 인간의 <자주성의 실현>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관점과 입장이야말로 세계의 지배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고수하고 세계를 인간을 위한 세계로 개조하기 위한 인간의 창조적 역할을 확고히 담보하는 관점과 입장이다. 이처럼 인간을 위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와 관점과 입장을 밝힘으로써 <주체의 세계관>은 지난 시기의 철학적 세계관의 일면성을 극복하고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운명문제에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해명을 준 철학적 세계관으로 될 수 있었다.


트랙백0 | 댓글0



중립적 입장의 허구성
김현환 소장 | 2009/10/04 01:03

중립적 입장의 허구성

[작성: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중립적 입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계급이 생겨나고 민족단위로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민족별로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해 왔다. 다시 말하면 계급 대 계급, 민족 대 민족의 대립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인간의 생명인 자주성과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중립적으로 서서 객관적인 구경꾼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 아니면 노예 소유주이다. 여기에 중립인(neutral being)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노예인데 노예 신세를 면하려면 노예소유주들과 생사의 투쟁을 벌려야 한다. 자유, 존엄, 평화, 진리는 쟁취하여 얻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리
, 평화, 자유, 인간의 존엄은 편드는(take a side with)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 증거이다. 예수가 기독교인들이 믿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하나님의 아들처럼 인종, 민족, 모든 가치관을 초월하여 객관성을 지닐 수 있는 완벽한 중립인이 어디 또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도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그 당시의 식민주의자인 로마 편을 들지 않고 시종일관 식민지 노예 신세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을 들었고, 로마의 추종세력인 헤롯왕의 편을 들지 않고 이스라엘 민중의 편을 들었으며, 유대교 지도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일반신도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와, 헤롯왕과 종교지도자 가야바의 합작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지배자의 편에 들거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부활은 십자가 다음에 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외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면서도 정의 편에 서서 마침내 승리한 자들만이 부활의 아침을 찬란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교
, 기독교 교인들이 믿는 여호아 하나님을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고센 땅에서 종살이하며 벽돌을 굽고 있었을 때 가장 편견이 없이 객관성을 지켜야 할 하나님 여호아가 누구의 편을 들었는가? 출애굽기 20 2절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여호아(Yahweh) 너의 하나님으로 너희를 이집트, 즉 속박의 집(house of bondage)에서 해방한 자(Liberator)니라."


전지
, 전능, 무소 부재한 하나님 여호아가 지배자 이집트의 편을 들지 않고 고난받고 굶주린 이스라엘 노예들의 편을 들어 그들을 해방하였다. 전지전능한 여호와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경계에 중립적으로 머무르며 이스라엘 노예들의 울부짖음과 굶주림을 구경이나 하고 무시하고 있지 않았다. 진리의 화신인 하나님도 그가 세상에 보낸 아들 예수도 억눌리고 배고픈 약자들의 편을 든 편견자였다. 진리, 평화, 자유, 인간의 존엄을 쟁취하는데는 객관적인 구경꾼 중립인은 설 자리가 없다.


맑스는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각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들은 그 시대의 지배층의 이념들이었다."(The ruling ideas of each age have ever been the ideas of its ruling class.)


영어번역에
ever(아직도 혹 항상) have been(현재완료)을 보면 "지금까지도 혹 항상 " 각 시대의 지배논리는 지배층의 논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쉽게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쓴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민중이 반드시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가 있는 말이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민중"(people as they are)은 위에서 맑스가 지적했듯이 이미 민중이 살고 있는 사회의 지배층의 지배논리에 사회화(socialization)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잘 못이 아니라 개인이 태어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이념기구(state ideological apparatus), 즉 학교, 종교, 언론, 출판, 등을 장악하고 민중을 쉽게 지배하기 위하여 거짓의식, 즉 지배논리를 주입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민중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기 힘들며 중립을 지키며 중립인이 되기 힘들다. 중립인의 위선이 여기에 있다. 왜냐면 민중은 이미 지배층의 지배논리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지배층의 편을 들게 되어있다. 나서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 이해관계의 충돌을 통하여 민중은 계급사회의 지배논리가 <거짓의식>으로 그들의 진정한 뜻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느끼게 된다. 그러나 상당한 사회과학적 안목이 없이는 지배논리의 허위성을 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배층의 대변자들(학자, 언론인, 작가, )이 내세우는 지배논리가 결코 만만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설사 그 허위를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추어내어 발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지금의 조, , 동 신문들을 포함하여 여러 보수언론들의 횡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는 진리를 밝히는 일은 감옥에 가는 길이었다. 그때는 진리를 밝히는 글을 쓰거나 그러한 책을 들고 다녀도 감시의 대상이었고 잡히면 감옥을 가야 했다.


에릭 프롬은 민중이 약한 이유는
<거짓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면, 즉 진실을 알게 되면 민중은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힘으로 성장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주체사상에서는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앞세워 인간을 개조하는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민중, 자주적인 사상으로 의식화된 민중만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중립인은 언제나 기회주의자로서 자기의 이익에 부합되는 쪽을 택하기 때문에 결국은 지배층에 기생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객관적 관찰자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인>으로 자처한다. 그들이 역사발전에 설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중립인이 출타한 사이에 집에 강도가 총을 들고 들어와 가족들을 위협하여 그의 부인과 딸들을 능욕하고 아들들을 때려눕히고 재산을 몰수한 후 계속 집에 머무르며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 중립인은 그것을 목격하고 단지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누가 옳은지를 관찰하며 구경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36년간 식민지 생활을 했다. 우리나라에 강도가 총칼을 들고 들어와 부녀자들을 능욕하고 젊은이들을 군대와 징용에 끌어가고 젊은 여자들을 정신대로 끌어가 군대의 노리개로 삼았으며 쌀을 비롯한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 이때도 중립인은 일제와 우리 민족사이의 경계에 중립적으로 서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우리 민중들이 택했어야 할 자세였다고 강변할 것인가?


지금 우리 민족은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져
1천만 이산가족들이 반세기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고 서로 정전상태에서 언제 전쟁이 다시 발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리고 동족끼리 총을 맞대고 무기경쟁으로 엄청난 재원을 낭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이남을 점령하고 전시 군통수권까지 장악하고 실제로 이남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립인은 휴전선(DMZ)이라는 경계에 서서 단지 중립을 지키며 구경이나 하겠다는 것인가? 중립인은 미국의 이남지배와 분단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할 것이다. 좁혀서 중립인은 자기 집에 강도가 들어와 자기 처와 딸들을 능욕하고 아들들을 때려눕히고 재산을 도둑질해도 자기 살 궁리나 하며 구경이나 하겠다고 솔직히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1972년 칠레에서 처음으로 정식 선거를 통하여 아이엔데 사회주의정권이 확립되었을 때 상당수의 카톨릭 사제들은 자신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독재와 싸운 것은 사회주의라는 <이념>(Ideology)을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신앙심에서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럼 그들은 과연 전혀 어떤 이념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들은 그들이 이미 생활 속에서 사회화되어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자본주의>라는 이념을 자신도 모르게 택했던 것이다. 이남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은 최고의 가치인 영생을 얻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포함한 어떤 <이념>도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라는 이념을 선택하여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단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가 익숙하여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이념이 아니고 사회주의만이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보다 평등하고 자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사회주의이다
. 여기에도 중립인이 설자리는 없다.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반드시 사회주의의 길로 나간다. 그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지적했듯이 사회주의는 과학이고 정의이고 자주이고 평화이기 때문이다. 중립인도 역사의 뒤안길에서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구경이나 하지 말고 정의의 편을 들어 투쟁하기 바란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당하게 역사의 방향이며 진리인 자주의 길, 민족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도.


트랙백0 | 댓글0



이북에서 내가 목격한 <참인간>
김현환 소장 | 2009/09/19 04:19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이북사회가 내가 60여 년간 살아온 이남과 미국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북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남이나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항상 궁금해하며 사색을 계속해 왔다. 체제가 다른 사회에 살면 인간도 달라지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생활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편 체제가 같은 사회에 살면 아무리 개인이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여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래 동안 기독교를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색다른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새벽기도도 한동안 열심히 하여 보았고 부흥회도 열심히 다녀보았고 성경학교도 다녀보았다. 그러나 기도할 때나 부흥회 때 회개하고 결단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교회 밖을 나오면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현실은 전에처럼 그대로 물질화폐관계로 냉정하게 인간관계가 이루어져 있었고 가난한 나의 가정형편은 나아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회 내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데 실망하였다. 결국 교회도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의 체제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사회체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면 교회자체가 분열되어 교회가 운영되기 힘들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신앙생활 따로, 실제적 생활 따로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북의 주체사상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격적 가치>가 <교환가치>로 전환되고 인간의 인격이 "돈과 재물에 의하여 평가된다."고 지적했는데 참으로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내부적으로 아무리 고상한 신앙심을 갖고 있거나 고상한 사상을 지닌 사람도 인격이 무시되기 십상이다. 지금 자본주의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자기들이 돈이 있을 때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친구들도 많았는데 갑자기 직장을 잃자 가장 친한 배우자, 자식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게 되니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이 땅에 천국건설을 외쳐왔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비인간적인 체제를 바꾸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순응하면서 집단구원이 아닌 개인의 기복신앙에나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마치 삐뚤어진 의자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삐뚤어진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사람만 고치려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은 마치 폐병환자에게 폐병치료는 하지 않고 폐병때문에 자주 걸리는 감기나 몸살이나 치료하는 것과 흡사하다. 사실상 기독교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집단적 구원", 혹 "사회적 구원"보다는 사적 소유에 기초한 개인주의를 지향하다보니 "개인의 구원"에 더 치중했기 때문에 여기 지상에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데 실패하였다고 판단된다. 덴막의 철인 키엘케골은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인간 각자 "신 앞에 선 단독자"로써 주관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사회성과 합리성을 부정했다.

나는 이북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차츰 서서히 이북의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처음에는 겉모양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처음에 사물의 겉이 보이고 나중에 속이 보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우선 그가 어떤 옷을 입었나를 보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 나를 보며 다음에 어떤 집에 사느냐를 본다. 인간이 "인격"으로가 아니라 "물질"로 평가되도록 사회 환경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 동안 다른 사람을 사귄 다음에야 그 사람의 됨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북을 방문하는 재미동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우선 자기들이 미국에 살면서 익숙하게 된 <물질적 가치관>으로 이북을 평가한다. 이들은 못산다, 잘산다는 가치척도를 물질, 돈에다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북의 지도원들에게 재미동포들이 이북을 방문하여 처음에 무슨 비평을 하건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재미동포들이 오래 동안 자본주의 체제에서 물질화폐관계로 사물을 판단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북사회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외부를 먼저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북의 주민들을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동안 종교와 철학, 사상을 연구해온 사람으로 이북을 방문할 때도 항상 이북이 지향하는 지도사상이 무엇이며,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관계는 어떤가,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은 어떤지, 문화종교생활은 어떤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관찰과 사색을 해왔다. 사람들이 잘살고 못산다는 의미가 단지 물질에만 있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물질은 단지 잘 살기 위한 인간의 객관적 조건에 불과하다. 객관적 조건인 물질이 주체적 존재인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나는 이북에 있는 나의 가족들인 두 고모들과 그 자식들(나의 고종 사촌들), 그리고 외삼촌과 그 자식들(외사촌들)을 자주 만나고 그곳의 지도원들과 식당과 호텔에서 일하는 여러 봉사원들을 만나면서 그곳의 인간들 사이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품성, 인간됨됨이가 어떤지를 세밀히 관찰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남과 미국에서 이북의 공민들처럼 그러한 <순수한 인간들>을 만난 적이 없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다른 동물과 다른 원래 인간인 "종족인간"(species-being)을 이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재미동포들처럼 돈, 자본, 물질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런 것들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하는 경우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이 바로 하늘(인내천)이라고 믿고 인간을 하늘처럼 대하는(이민위천) 이북의 민중중심의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인간이 상품화 될 수 없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우리의 누이들이 미군의 노리개로 딸라에 사고 팔리는 것을 매일 목격하였고 인간의 신성한 노동력마저 값이 매겨져 사고 팔리는 것을 매일 보며 살아왔다. 지금도 서울에서는 쇼 윈도우 속에 여성들을 나체로 진열해 놓고 몸을 팔게 하는 공창이 존재한다고 최근 이남신문이 보도한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유럽에서는 여러 곳에 그러한 공창이 존재한다고 한다. 아직도 로스엔젤레스 시의 여기저기에 인간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씩에 노동현장으로 팔려 나가고 있고 그것도 안 되는 사람들은 그날 점심과 저녁을 먹여주는 조건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건축재료상인 홈 데포(Home Depo)의 앞에 가면 라티노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일하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북 사회주의사회처럼 인간이 상품화되지 않고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 살다 보면 이북에서 내가 목격한 <원초적 인간형>이 나온다고 생각된다. 맑스가 강조한 <소외되지 않은 인간>을 이북의 인간들 속에서 발견한다.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 단지 생산력을 높여 자본주의사회보다 더 물질적으로 잘 살자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에 지적한 소외되지 않은 <원래의 인간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이 원래는 집단주의적 존재, 즉 "사회적 존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여유식량이 생기면서 그것을 더 점유한 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면서 <개인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사적 소유의 산물인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는 결국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열되어 소수의 생산수단과 정권을 잡은 지배계급이 대다수의 민중을 착취하고 압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적 소유제도에 근거한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한 이북같은 사회주의사회는 인간을 <개인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로 환원시켜 놓았다.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인간이란 <개인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지금 민족적 단위, 민족국가단위로 각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있고 생활하고 있는 현실상황에서 민족이라는 집단을 떠난 개인의 생활이란 사실 불가능하다. 개인은 자기가 혼자, 혹은 핵가족 중심으로 자기가 벌어 먹고 살아가고 있으니 집단이 뭐가 필요하며 민족이 뭐가 필요하냐고 말 할 수 있으나 인간은 주체사상이 강조하듯이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활동하여야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고 집단적 협력에 의해서만 자연과 사회를 개조할 수 있으며 자주적 요구를 실현 할 수 있다.

이북은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집단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인간을 이기적이고 뒤틀린 "개인주의적 존재"에서 원래의 "사회적 존재"로 되돌려 논 것이 이북사회주의 사회의 특징이라고 보겠다. 그리하여 이북에서는 "내 땅, 내 집, 내 공장, 내 농장, 내 도서관" 대신에 "우리 땅, 우리 집, 우리 공장, 우리 농장(협동농장), 우리 도서관( 인민대학습)," “인민문화궁전,”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 실제로 모든 중요한 소유가 민중 전체의 것이다. 이북의 사회주의헌법 제2장 제20조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

물론 여기서 "국가소유는 전체 인민의 소유이다."(제21조)

이처럼 이북 사회주의사회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개인주의를 낳는다고 보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자체를 공유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인 사회성, 사회적 존재를 되찾아 주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데 어떤 사회적 존재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고 지적한 것은 사실 맑스주의에서도 강조되었다. 맑스주의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밝힌 것은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 처음이다.

인간도 <물질적 존재>이지만 다른 어느 물질적 존재보다도 <발전된 유기체>를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뇌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반영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른 물질과 달리 뇌수가 현실을 반영한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발전된 유기체와 그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뇌수는 단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갖게 하는 "생물학적 바탕," 즉 객관적 조건에 불과하다.

그 자체가 사람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회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회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이 바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고 주체사상은 밝히고 있다. 주체사상은 인간이 뇌수의 기능인 "의식을 가지고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본능에 의하여 움직이는 동물과 질적으로 구별된다."고 지적하였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역사는 결국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발전역사"이며 인간은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귀중하고 힘있는 존재," "세계의 유일한 주인, 유일한 개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귀중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단지 "물질적 생산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상품으로 매매되는 노동력을 소유한 하찮은 존재"로, 또한 "황금에 의하여 지배되는 무기력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체사상은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주체사상은 인간을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정의 내림으로서 그 동안 착취사회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본성"을 되찾아 주었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대한으로 높여 주었다. 참으로 이북의 사회주의사회는 앞에서 강조했듯이 인간을 자본이 아니라 인격으로, 즉 인간의 됨됨이(what he or she is)로 평가하는 원래의 인간가치로 되돌려 놓았기에 이북 주민들이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물론 지금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완성된 단계는 아니지만 원초적 인간을 향하여 나아가는 참인간을 이북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에게 일말의 희망을 던져주는 일대 사건이라고 본다.


트랙백0 | 댓글0



[PREV] [1][2][3][4][5][6][7][8][9] ... [62] [NEXT]
관리자  |   글쓰기
BLOG main image
자주사상 즉 주체사상 관련 자료수집, 학술연구, 저술활동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특히 자주의 새 시대를 이끄는 선군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체 (245)
2.16 특집 (16)
김현환 소장 (103)
연구소 동정 (15)
연구소 임원 (7)
자주사상 (5)
선군정치 (56)
강성대국 (4)
조국통일 (1)
3.8 세계 여성의 날 (6)
신간서적 (4)
애국애족 (2)
민족공조 (1)
9.9절 특집 (11)
12.24특집 (7)
중국이 이북에 개혁개방정책을 강요했나?
사상사업을 앞세워야 하는 이유
김정일 위원장의 최근 중국방문의 의미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과 후계자 문제
차기 이남의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자력갱생으로 살겠다는 이북을 그만 내버..
오바마미행정부의 <변화>정책의 허구성
이명박 대통령의 <정체성>논란의 문제점
이명박장로님, 곽선희 원로목사의 권고를..
전운이 감도는 코리아반도의 이북을 방문..
천안함 침몰사건과 이북의 <선군정치>의..
미국의 <인권재판관 행세>를 비판한다
먹는대로 싼다
진심만이 통한다
새롭게 태어난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평화협정>을 우선적으로
강선의 노을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
중립적 입장의 허구성
이북에서 내가 목격한 <참인간>
세계 사회변혁운동의 맨 앞자리에 선 이북
사람을 낚는 어부
노무현.김대중 두 대통령님들의 부활을..
<군사 강국>보다 더 무서운 <사상의 강국>
이북의 최고지도자(수령)에 대한 올바른..
이북의 후계자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는 조국의 품이어야..
이명박정부의 통일론과 그 극복방안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 나의 조국
민족대단결로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자
Total : 115362
Today : 2
Yesterday : 11
태터툴즈 배너
rss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관리자’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com / Designed by plyfl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