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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한 주체적 견해
김현환 소장 | 2008/05/14 21:36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나: 최근 이남에서는 <포스트주의>가 많이 논의 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와 한국사회]('사회평론', 1992. 9/10), 이병천 교수의 [포스트 맑시즘논의에 대하여]('사회평론', 1992. 9/10), [정통 맑스주의에서 포스트 구조주의까지]('길', 1997. 6), [포스트(탈)주의는 무엇을 포스트하였는가],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극복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길', 1997. 3), 등 학계와 언론계에서 <포스트주의>, <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한 논의가 많고 그를 틈타 <제3의 길>을 제창하는 이론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의 본질을 고수하고 민중에게 주체사상의 독창성과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데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반변혁적 본질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혁명사상은 온갖 적대계급의 반변혁 사상, 기회주의 사상과의 투쟁 속에서 그 순결성이 고수되고 정당성이 과시되었으며 민중 자신의 사상으로 되어왔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주체철학과 배치되는 온갖 이색적인 철학 사조를 철저히 경계하며 주체철학의 순결성을 확고히 보장하여야 합니다."

이남에서 토론되고 있는 [포스트 맑스주의]는 노동자계급의 변혁사상을 부정하는 기회주의 사조입니다. 학계와 언론계에서 포스트 맑스주의가 계속 토론되고 있는 것은 민중 속에서 주체사상의 확산을 막아 보려는 반변혁적 지배층의 정책 중의 하나입니다. 이남의 지배층들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사회주의를 포기한 이론가들을 내세워 변혁운동 세력을 분열시키려 시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포스트 맑스주의의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주체사상의 본질을 고수하고 변혁운동 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지배층의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고 민중의 자주의식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로 됩니다.

1) 포스트 맑스주의란 어떤 사조인가

나: 먼저 [포스트주의]란 어떤 사조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으면 합니다.

주: 먼저 [포스트주의]에 대한 일반적 이해부터 올바로 가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접두사 포스트(post)라는 말은 '후기', '탈',(벗어난다는 뜻)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와 함께 '변화', '낡은', '안티'(반대)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포스트>라는 말이 사회과학 분야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 구미자본주의 사회에서 논의된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부터입니다.

<모더니즘>은 형식주의 문학예술을 구미사회에 적합한 '현대적인 것'으로 자처한 데서 나온 '현대주의'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결코 진보적인 것으로 될 수 없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포스트의 이름하에 이른바 '전체주의적 억압구조에 저항하여', '주관성'과 '개체의 자유'를 찬양하는 '현대의 이념'으로서 더욱 반사회주의적이고 반민중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민중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확대되어 지난 '모던 사회'(산업사회)의 온갖 이론이 후기 산업사회(정보사회)에는 맞지 않으므로 '비판', '단절', '이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산업사회'의 이론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라는 이름하에 더욱 반변혁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것으로 변색, 개악된 것이 [포스트주의]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철학분야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변색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후기 산업사회 즉 발전된 '정보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이 맞지 않으며 새로운 이론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우익 개량주의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의 대표적 인물들로는 영국의 엘레스트 라클라우, 쟁탈 무페, 코헨, 미국의 미체, 알버트, 로빈, 하넬, 프랑스의 포가울드, 보미오, 독일의 아도르노, 쥬르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책자로 라클라우와 무페가 공동으로 쓴 [맑스주의를 개작한다, 헤게모니와 새로운 정치운동](1982)과 [사회변혁과 헤게모니](1985),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후기 산업사회에 맞게 '맑스주의를 개작'한다는 미명하에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남의 한 필자도 "그것은 '안티ㅡ/탈ㅡ/변한 맑시즘'으로 맑시즘의 합리적 핵심을 부정하며 어떤 진보적 정치의 방향성도 결여한 것으로 규정된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포스트 맑스주의는 현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청산주의적’ 기회주의적 사조입니다.

나: [포스트 맑스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여건에서 어떻게 발생하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주: 그렇습니다. 어떠한 사상이나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계급적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의 발생의 역사적 배경과 계급적 기초에 대한 분석은 그것의 본질을 올바르게 규정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후기 산업사회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왔고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더욱 힘을 얻기 시작한 우익 개량주의 사조입니다.

1970년대에 자본주의 경제는 1930년대의 세계공황 전야를 방불케 하는 심각한 위기국면에 직면하였으며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만성적인 인플레와 생산의 침체가 겹쳐 고질화된 침체 인플레가 계속 심화됨으로써 그 전도를 더욱 어둡게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80년대까지 이러한 경제위기로부터의 출로를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새 기술도입'과 무분별한 군비경쟁에서 찾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구미의 일부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외면하고 '사회적으로 규제되지 않은 과학기술문명의 팽창'과 '군비경쟁'이 생태계와 환경공해를 야기시켰다고 하면서 그로 인하여 인류는 새로운 형태의 '위기의식'에 직면하였다고 역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외면하고 '기술발전'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와 그로 인한 역습이 인류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위기의식'과 인간과 사회관계에 있어서도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가 인간의 정서적, 미학적 욕구와 가치를 체계적으로 억압한다는 '문제의식'을 세우고 그에 대한 도전, '극복대안'으로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창출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과학기술문명의 팽창'은 환경공해, 생태계의 파괴, 군비경쟁, 정보통제, 기술 관료주의 등에서 드러나는 데 그것은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주면서 '인류의 안전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은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위기로부터 파생된 부차적인 '위기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에 도전한다는 의도로 창출되었지만 모더니즘보다 더 한층 교활한 수법으로 자본주의를 변호하고 사회주의를 중상하는 반변혁적 사조이며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을 외면하고 노동자계급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여러 사회세력)의 '탄력적 관계'(동격관계)에 의한 '새로운 사회운동'을 제창하는 개량주의입니다.

이남의 한 필자가 "포스트 모더니즘은 유럽에서 변혁운동의 전망을 상실하면서 나타난 신 중간층의 패배주의적 지적 사조 즉 변혁운동의 전망성을 결여한 신 중간층들의 소부르조아적 대응책"이라고 쓴 것은 비교적 올바른 비평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자본주의가 산생하는 위기를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안고 있는 기본 모순에서 찾지 않고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새 기술도입'을 위한 '과학기술문명의 팽창'과 같은 부차적인 조건에서 찾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반변혁적 본질을 감싸는 이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탈산업사회'의 여건에서는 사회변혁운동이 '맑스주의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민운동'으로 되어야 한다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회학 이론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든 과학 분야에 확산되는 가운데 철학 분야에도 영향이 미쳐 [포스트 맑스주의]가 창출되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구미의 자본주의가 포스트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이른바 '중산층화'가 실현된 '복지국가'로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맑스주의는 더는 적합하지 않으며 '위기'에 처했다는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한 것이 [포스트 맑스주의]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의 발생 여건으로 내세우는 '맑스주의 위기'란 반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저들의 기회주의적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동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이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주의적 입장에 매달려 사회주의 건설에서 침체와 우여곡절을 겪게 되자 그 대안을 맑스ㅡ레닌주의를 포기하고 현대 수정주의, 현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창한 <제3의 길>을 찾는 데로 나아갔으며 결국 민중이 피로써 쟁취한 사회주의를 붕괴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포스트 맑스주의가 서방 세계에서 급속히 확산되게 된 중요한 조건으로 되었습니다.

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맑스주의 위기'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주의 위기'를 크게 두 가지로 근거 짓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나라들에서 맑스주의를 지침으로 하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점차 '쇠퇴'하였다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제패를 노리는 미제의 야망과 미제의 '비호'밑에 재기하려는 제국주의 연합세력들의 지향이 합쳐져 제국주의자들은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재편성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바로 자본의 국제화를 통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경제 기술적 의존과 결탁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다국적 기업'을 형성함으로써 직접투자를 위주로 한 자본수출을 전례 없는 규모로 진행하였습니다. 미제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뒷받침 밑에 재생된 서독과 일본 그리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의 독점자본은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전 수준으로 올라섰으며 1958년 이후 부터는 본격적인 해외시장에로의 진출을 개시하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는 거대한 독점체들의 '다국적 기업화'를 급속히 추진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직접투자에 의한 해외진출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미제를 주축으로 하는 자본의 국제화가 추진되고 경제 기술적으로 의존결탁하게 됨으로써 파멸에 직면하였던 재국주의는 경제 기술적으로 일시적인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이 없어진 것이 아니며 제국주의자들의 일시적인 결탁이 그들 사이의 모순을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일시적인 '발전'을 그 체제의 '우월성'에 기초한 합법칙적 과정으로 분식하면서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강조하며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론을 밝힌 유물사관은 '영원히 낡았으므로 폐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 성과에 의한 '산업의 합리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을 생산 공정의 기계화, 흐름식 작업에 얽어매어 기계의 부속물로, 임금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독점 자본가들은 한편으로는 노동자 상층을 매수하여 '노동귀족'을 대대적으로 양산해내고 그들을 통하여 '노사협조'를 하도록 부추겼으며 노동자들도 주권을 '소유'한 '공장의 주인', '사회의 주인'이라는 허위의식을 가지도록 기만적 구호를 들게 하였습니다.

한편 자본주의 나라의 공산당들과 노동당들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혁명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노동자계급의 당을 강화하고 변혁투쟁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한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최근시기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저조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들은 제국주의의 일부 이론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기본적 모순이 해결되고 자본주의는 '죽어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장성하고 번영하는 자본주의'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인 노동운동은 '쇠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맑스주의 위기'라는 저들의 기회주의적 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이라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나: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맑스주의 위기'와는 서로 연관이 있는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변질과 붕괴과정의 원인을 저들의 기회주의적 이론을 합리화하는 측면에서 찾고 있습니다. 현대 수정주의의 악영향으로 동유럽 사회주의는 여러 가지 진통을 겪으면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변질과정이 가속화되어 눈에 띄게 나타났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미 전부터 주장해 오던 '맑스주의 위기'를 더 한층 요란스럽게 외치면서 맑스주의의 '폐기'와 포스트 맑스주의에로의 전환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맑스ㅡ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혼란'은 바로 맑스주의가 더는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낡은 것'이므로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노동자계급의 사상, 노동자계급의 사상=맑스주의로 주사와 빈사를 바꾸는 논리적 비약을 하며 일체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은 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이 변질되어 혼란, 붕괴에로 내닫게 된 것은 현대 수정주의의 대두와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개인숭배>를 비판한다는 구실 밑에 변혁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수령이 차지하는 절대적 지위와 결정적 역할을 전면 부정하였으며 뒤이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전민적 국가'에로의 전환을 선포함으로써 계급투쟁을 비롯한 사회변혁운동을 포기하였습니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이러한 반변혁적, 반민중적 배신행위는 소련 자체의 사회주의 건설을 침체와 퇴보, 붕괴에로 몰아간 것은 물론이고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의 혁명과 건설에 거대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전 소련을 동유럽 사회주의의 변질의 진원지로 낙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의 집권당들이 소련에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맑스ㅡ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대하면서 자주적인 노선과 정책을 세우고 관철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이 나라들의 집권당 자체 내에 현대 수정주의의 노선을 받아들이고 확산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 집권당들인 공산당, 노동당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기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회민주당과 기계적으로 합당하는 방법으로 결성되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기계적인 합당 이후 당내에서 기회주의적 요소들을 철저히 근절하기 위한 투쟁도 적극적으로 벌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명색은 사회주의 나라 집권당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수정주의적, 개량주의적 요소가 다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 수정주의의 대두는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 집권당 안의 개량주의적 분파와 관료화된 반사회주의 세력의 부활을 적극 부추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들에서는 '탈 스탈린화'의 명분아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신세력'이 형성되었고 이들의 적극적인 뒷받침 아래 감행된 것이 1956년 폴란드에서의 포즈난 노동자폭동, 1956년 12월 헝가리에서의 임네나지 일당의 반변혁적 폭동, 1968년 8월 체스코슬로바키아에서의 '프라하의 봄' 사건 등입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경제 분야에서 경제 관리에서 '탈 중앙집권화' 현상이 공개적으로 활성화되고 '공개성'과 '개방'의 물결을 타고 제국주의자들의 사상문화가 홍수처럼 밀려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들에서는 공공연히 맑스주의의 '진부론'과 사회주의의 '실패론', 자본주의의 '영원론'과 공산주의의 '멸망론'까지 역설되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주의를 지침으로 하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혼란'이 '맑스주의의 인식론적 기초'를 허물어 버렸다느니, '맑스주의의 최대의 위기'라느니 하면서 맑스주의의 '청산'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아무리 1970년대 말 80년대 초에 이르러 동유럽 사회주의의 '혼란'과 변질을 구실로 '맑스주의 위기'를 강조하며 그 '대안'으로서 포스트 맑스주의를 제창하여도 자본주의의 변호론, 기회주의, 개량주의적 정체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나: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정체를 그들의 구체적인 주장에 앞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사상적 기초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주: 포스트 맑스주의는 최근 연간 나타난 변색된 우경기회주의이지만 그 기원을 따져보면 각양각색의 기회주의 사조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포스트 맑스주의는 신칸트주의, 베른쉬타인주의, 합법적 맑스주의, 네오 맑스주의를 비롯한 반동적 기회주의 이론들을 개악하여 절충한 '꿀꿀이 죽'에 '현대성'의 감투를 씌운 가장 반변혁적인 기회주의 이론입니다.

나: 그러면 먼저 신칸트주의와 포스트 맑스주의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요약해 말씀해 주시지요.

주: 현대 부르조아 철학의 대표적인 한 파인 <신 칸트주의>는 1860년대에 창시되어 역사적으로 국제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지침으로 되었던 맑스ㅡ레닌주의를 거부하였던 좌, 우경 기회주의의 사상 이론적 기초로 되었으며 오늘도 '사회주의 종말'을 주장하며 반사회주의적 정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의 사상적 무기로 되고 있습니다. 신 칸트주의는 중세기에는 종교가 철학을 위협하였다면 오늘은 과학이 철학을 위협한다는 구실 밑에 칸트철학에로 돌아갈 것을 설교하면서 칸트철학의 보수적 측면을 개악한 것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무엇보다도 <순수 의지>에 관한 논의로써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신 칸트주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신 칸트주의는 사회를 '도덕적 인격의 공동체', '개별적 주관적인 의지의 결합체'라고 하면서 사람을 단독적인 존재로 왜곡하였으며 그것도 윤리 도덕적 '개체'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맑스주의에서 강조하듯이 '서유럽의 정보사회의 조건에서 인간과 인간관계, 인간과 사회관계에 있어서 유물사관에 의한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가 인간의 정서적, 표출적, 미학적 욕구와 가치, 자유를 체계적으로 억압한다. ‘는 구실 밑에 개인의 무제한한 '자유'를 주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을 전면 부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오늘 포스트 맑스주의 제창자들이 무정형적인 '복합 주체론'을 강조하면서 계급투쟁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운동'에서 여러 '사회적 주체'들이 '동격연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외면하고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전면 부정하는 신 칸트주의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신 칸트주의는 '순수 의지'의 규범에서 기본은 '법의식'을 완성된 표현으로 하는 '도덕적 자의식'이며 부르조아 국가는 이 '도덕적 자의식'의 귀결이며 '도덕적 자의식'을 실현하는 데서 기본은 '순결'을 지키고 부르조아 국가와 타협하는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에서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중적 민주화'의 실현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민중의 이른바 '도덕적 이해'라는 미명하에 타협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에서 강조하는 타협주의의 내용은 바로 신 칸트주의의 '순수 의지설’에 의한 부르조아 국가와의 타협설을 모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다음으로 '윤리적 사회주의'를 들고 계급투쟁을 반대한 신 칸트주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부르조아 국가에서 '도덕적 진보'만 이룩하면 '법률국가'인 '사회주의'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은 '수동혁명'(폭력혁명)인바 그렇게 되면 전복된 계급이 또 다시 '수동혁명'을 일으키고 이러한 양상이 반복되는 과정에 사회는 먼지투성이의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괴이한 '이론'을 펴면서 민중의 도덕적 능력의 향상으로 부르조아 국가를 '이해'하면 국회의석 확대를 위한 '온화한 의회투쟁' 방식으로 사회주의에로 이행할 수 있다는 '평화적 이행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신 칸트주의의 '윤리적 사회주의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론이라 하겠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또한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거부하는 신 칸트주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신 칸트주의자들은 자연현상에는 연속적인 과정이 작용하지만 사회역사에는 개별적이며 비반복적인 사건들만 존재하므로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항상 사물의 일회적인 개별적 흐름에 대하여 생각한다."고 지적하면서 사회역사에는 어떠한 객관적 법칙이나 인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 칸트주의는 역시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중요한 철학적 기초로도 되었습니다.

나: 그러면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포스트 맑스주의와의 연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나 베른쉬타인 주의는 다같이 '변천된 시대'라는 구실 밑에 맑스주의의 기본적 원칙을 거부하고 노동자계급의 변혁투쟁을 포기할 것을 주장하는 기본적인 공통성을 가집니다. 베른쉬타인은 '평화적 이행론'을 들고 나와 자본주의도 점차적으로 사회주의에로 성장해간다는 구실 밑에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는 투항주의를 설교하는 데로 나아갔습니다. 오늘날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의 좌절의 원인을 계급투쟁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지배의 결과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또한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을 거부하면서 제국주의를 미화 분식하고 그 멸망의 필연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맑스주의의 '두 가지 차원의 극복'이라는 미명하에 계급투쟁과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밝힌 이론은 완전히 '청산', '폐지'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을 밝힌 <잉여가치 학설>도 '청산'하고 '상품', '가치', '자본'과 같은 몇 가지 개념들만 '보존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보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절대적 및 상대적 빈궁화 이론이 통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는 여러 차례의 공황을 겪었지만 자기 발전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지적하면서 자본주의를 공공연히 옹호하고 그 멸망의 불가피성을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포스트 맑스주의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나: 이번에는 [네오 맑스주의]와 포스트 맑스주의와의 연관에 대하여 요약해 주시지요.

주: [네오 맑스주의]는 산업사회의 조건에서 맑스ㅡ레닌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이른바 '비판철학'으로 불리는 현대 부르조아 철학의 일종으로 1930년대 독일에서 발족하여 1950ㅡ1970년대에 걸쳐 구미사회에 퍼졌습니다. 네오 맑스주의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하여 좌경적이며 초혁명적인 주장을 하면서 심지어는 '맑스주의자'로까지 자처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네오 맑스주의는 한 편으로는 '비판철학'으로 불리면서 다른 편으로는 '뉴레프트'(신좌익), '신맑스주의'로 불리기도 합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에 대한 지나친 왜곡과 비평을 일삼는 네오 맑스주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네오 맑스주의는 첫 노동자계급의 수령들의 사상을 비속화하고 서로 대립시키며 그들이 이룩한 역사적 업적을 허무는 것으로 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판'의 이름으로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 맑스와 엥겔스, 맑스와 레닌을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맑스가 아직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의 저작들에 맑스주의의 본질이 있는 것처럼 해석하면서 엥겔스나 레닌에 의하여 맑스주의의 '사상적 진수'가 부정되고 '개악'된 것처럼 역설하였습니다.

오늘날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한 후기 맑스와 레닌의 이론을 배격하고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초기 맑스주의와 일시적으로 '신경제정책'을 제기하고 '네프만'들이 성장하던 시기의 후기 레닌의 이론을 결합시킨 것이 '사회주의 이상'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또한 이른바 '사회비판이론'이라는 미명하에 자본주의를 미화 분식하는 네오 맑스주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네오 맑스주의가 강조하는 '후기 자본주의 비판'은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대한 비판, '이성비판'이지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 계급적,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네오 맑스주의는 사회생활의 근본문제,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산업사회'인 것만큼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현시대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인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로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오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에는 본질적인 구별이 없으며 생산 공정이 자동화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무의미하고 기술의 지배, 다시 말하여 기술자, 자본가에 의한 '기술관리'가 기본으로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생산 공정이 자동화됨에 따라 '산 노동'과 '죽은 노동'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에 '잉여가치'의 개념도 낡아졌다고 지적합니다. 말하자면 기계가 모든 것을 생산하는 것만큼 '산 노동'에 대한 착취의 원천으로 되는 '잉여가치'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유럽의 '시민사회'의 조건에서는 사회의 '중산층화'가 실현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착취의 근원에 관한 이론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또한 초혁명적인 구호 밑에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부정하는 네오 맑스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네오 맑스주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의 담당자는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소수 '비판적 인텔리' 또는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이른바 '엘리트'를 들고 있습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이 '소외'되고 정신적으로 '불구가 된'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한 주역을 담당하는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하면서 '통찰력'이 있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교양'이 있는 '지식인'이 아니면 기술적 진보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관리사회의 내부에 통합될 수 없는' 실업자, 노동능력 상실자, 유색인종 등이 혁명의 담당자로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네오 맑스주의의 이러한 반동적 주장들은 오늘 포스트 맑스주의에서 계급투쟁론의 부정,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영도적 지위의 부정, '인텔리의 영도적 역할론', 새로운 '시민운동론'의 제창들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제국주의자들이 자기의 사상적 추종자들을 내세워 포스트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고 있는 것은 낡은 이론만 가지고서는 민중을 더는 속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포스트 맑스주의가 지난 시기의 온갖 반동적 기회주의 이론의 보수적 측면을 교묘하게 개악하여 절충주의적으로 결합시킨 것으로서 민중의 자주의식,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마약으로 '쓸모'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오늘 포스트 맑스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개량과 '영원성'을 설교하는 기회주의 사조로서 제국주의자들과 반변혁적 착취계급의 사상적 무기의 하나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2)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

나: 최근시기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서 허덕이면서도 허장성세하는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저들의 이론가들을 내세워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설교하면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을 와해시킬 목적 밑에 포스트 맑스주의와 같은 개량주의적 사조들을 유포시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에 대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주장을 놓고 분석해 주었으면 합니다.

주: [포스트 맑스주의]는 1980년대 중엽 영국의 엘레스트 라클라우와 여성 이론가인 쟁탈 무페가 공동으로 집필한 [사회변혁과 헤게모니](1985년),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등에서 포스트 맑스주의를 공개적으로 제창한 때부터 하나의 공인된 기회주의적 사조로서 유럽은 물론 90년대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여러 지역들에 급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 주석께서는 다음과 말했습니다.

"좌우경 기회주의는 노동운동 내에 나타난 부르조아 및 소부르조아 사상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 역시 최근 시기 노동운동 내에 나타난 부르조아 및 소부르조아 사상으로서 극우익 개량주의적 사조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노동자계급의 당과 수령의 혁명적 영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면 부인하고 계급투쟁을 반대하면서 적아간의 계선을 모호하게 하며 제국주의 부르조아지와의 타협을 공공연히 설교하는 우경 투항주의의 최신 변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의 부정,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거부, '신사회운동'의 제창 등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 그러면 먼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을 부정하는 포스트 맑스주의의 주장을 분석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주: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은 무엇보다도 이른바 '복합 주체론'을 들고 나오면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을 극력 부인하는 데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에서는 '헤게모니'개념이 출발적 범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원래 <헤게모니>란 “영도”, “영도권”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 맑스주의에서는 헤게모니란 '여러 역사적 블록들, 사회적 주체'들의 '상호 동격연대' 또는 '민주주의의 확장'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에서 '완전히 탈피'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복합 주체론'(일명 '다원적 주체론')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이남과 유럽사회에서는 '주체'라는 표현을 '사회적 행위의 담당자'라는 단순한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사회의 소집단, 개별적인 구락부, 일시적인 운동단체 등에 대해서도 마구 쓰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에 의하면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계급, 계층과 함께 다양한 소집단 그리고 성, 인종, 민족 등도 각각 하나의 '사회적 주체'로 됩니다. 따라서 '복합 주체'란 노동자와 사회의 각 계층, 여성, 인종 등의 기계적 우연적 집합체입니다.

라클라우는 "어떤 사회에서도 모든 사회적 행위자는 사회적 생산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성, 인종, 민족, 이웃의 사회관계들도 포함하여 사회관계의 다양성 속에 각인된다. 이러한 모든 사회적 관계는 위치성 혹은 주체위치를 규정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행위자는 다수의 주체위치들의 소재지며 단 하나의 주체위치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나도 고전적 맑스주의의 계급 환원주의를 반대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현시점에서 유럽의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학기술 혁명'으로 인하여 육체노동자가 수적으로 줄어들고 화이트칼라가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중산계급'으로 화하였으므로 더 이상 계급 양극화의 경향도, 노동자계급을 영도계급으로 하는 계급투쟁의 경향도 보이지 않으며 '사회적 주체'들의 '동격연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실업자 대군이 갈수록 증대되고 자기 집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해 거리에 나도는 사람, 문맹자가 노동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화이트칼라가 대부분을 이루며 '중산층화'가 실현되었다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현실을 외면한 허구입니다.

또한 착취계급 사회에서는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적대적 대립과 투쟁이 사회관계의 기본으로 됩니다. 자본가계급을 반대하는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에 의하여 규정되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교묘하게도 착취사회의 기본적인 사회관계를 <계급개념>을 떠나 '여러 사회적 주체'들의 '동격연대'로 왜곡하는 것은 노자간의 계급투쟁,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을 부정하기 위한 주장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또한 '복합주체론'을 주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론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합주체', '다원적 주체'가 기정현실로 된 여건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운동의 '주체'를 대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의 전위부대인 당이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다원화된 주체'를 영도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 전위당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을 전면 부정하면서 거기에 온화한 '의회투쟁'을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을 드러내는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그러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의견은 어떤 것인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은 또한 이른바 '급진적 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는 데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맑스주의는 계급적 성격에 의하여 규정되는 상이한 민주주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나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차적인 인식'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의 확장', 다시 말하여 '급진적 민주주의'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에서 논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란 '확장된 민주주의', '초계급적 민주주의', '순수 민주주의'입니다. 즉 민주주의에 계급적 성격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는 '만인에 대한 민주주의'입니다. 이것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위장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반드시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는 두 가지 형태의 민주주의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민중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입니다. 계급사회에서 '제3의 민주주의', (만인에 대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급진적 민주주의'를 통한 '완전한 평등', '완전한 자유'의 실현을 운운하는 것은 후기 산업사회의 '중산층화'라는 허구적 구상을 내세우고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모순과 착취적 본질을 가리며 노동자계급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거부함으로써 민중으로 하여금 계급투쟁, 사회변혁운동에 나설 수 없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창하는 '신사회 운동론'의 기회주의적 본질은 어떤 것인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은 이른바 '신사회 운동'을 사회변혁의 유일한 방도로 내세우고 있는데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사회가 아닌 '중산층화'가 실현된 '시민사회'로 미화 분식하면서 '주체'가 다원화된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운동은 계급운동이 아니라 '시민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원래 '시민사회'란 봉건사회 말기 신흥 부르조아지가 중심이 되어 형성된 '시장사회', 부르조아지가 지배하는 '상업영역'을 가리키는 뜻으로 헤겔이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입니다. 당시 '시민'이란 부르조아지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봉건투쟁시기의 '시민운동'은 다름 아닌 '시민혁명', '부르조아혁명'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맑스주의에서 논하는 '시민사회', '시민운동'은 그것과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에서 논하는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1891ㅡ1937)에 의하여 1931년 초에 처음으로 제창된 개념으로서 여기서 '시민'이란 유럽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주민', 더 넓게는 '공민' 전체를 뜻합니다. 즉 이른바 '중산층화'가 실현된 유럽 자본주의 나라 '공민'을 의미하며 따라서 후기 산업사회를 이른바 '시민사회'라고 하였습니다. '시민운동' 역시 후기 산업사회에서 벌어지는 '초계급적인 대중운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람시에 의하면 자본주의 국가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국가'입니다. '시민사회'는 지배적 집단이 전 사회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기능에 대응하는 비국가 영역의 총체 즉 각종 정당, 노동조합, 교회, 학교, 언론기관, 문화기관 등 사회적 기구들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그람시는 '조화로운 사회'를 위하여 '정치사회'를 '시민사회'가 흡수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그 방도를 점차적인 개량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람시의 개량주의적이며 투항주의적 '시민사회'에 관한 이론은 그 후 이탈리아 공산당의 개량주의적 '구조개혁론'으로 나타났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그람시의 '시민사회론'을 그의 최대의 업적이라고 찬양하면서 '신사회 운동'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신사회 운동'의 기회주의적 본질은 그 '운동'의 근거를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간의 모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사회적 집단'의 '정치적 결합'에 의한 생활세계의 '민주화', '정치적 권위주의로부터 시민민주주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래 '신사회 운동'은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영향 하에 각국의 '시민운동'으로 구미사회에 광범히 파급되었습니다. 그 후 온화한 '국회의석확보 운동', 생활환경보호 운동, 반핵평화 운동, 여성 운동, 청년 운동, 생태주의 운동, 도시사회 운동, 지역 운동과 지역분리 운동, 반인종 운동 등의 부문 운동으로 광범히 전개되면서 1980년대에 정식 '신사회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신사회 운동'을 근거 짓는 데서 후기 산업사회에서 '주체'의 '다원화'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주체'가 '다원화'된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마땅히 그들 상호간의 '동격연대'에 의한 '신사회 운동'이 사회변혁의 '기본형식'으로 되어야 하며 '계급투쟁 전략으로부터 새로운 정치적 전략에로 전환'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의회투쟁'과 환경보호 운동과 같은 '신사회 운동'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본질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이론의 반변혁성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의 반동성, 해독성을 옳게 파악하는 것은 그것을 반대하는 투쟁을 성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는 개량주의자들, 수정주의자들이 '계급협조'를 주장하면서 혁명운동발전에 커다란 해독을 끼치었다."

포스트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이론의 반동성, 해독성은 '맑스주의 청산'의 구호 하에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을 전면 부정하는 것, 자본주의에 대한 미화 분식과 사회주의에 대하여 비방하는 것,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계급의식,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그러면 '맑스주의 위기'를 주장하면서 '맑스주의 청산'의 구실 밑에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을 전면 부정하는 데 대하여 먼저 해설해 주시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던의 조건'이요, '동유럽과 사회주의의 혼란'이요 하면서 '맑스주의의 전면 위기설'을 퍼뜨리면서 그 '청산'과 '폐기'에 대하여 요란스럽게 떠들었습니다. 이것은 본질상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의 전면 부정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라클라우는 1988년 4월 미국의 저널 [전략지]의 편집부와의 대담에서 "맑스주의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다.", "20년 후에는 아무도 맑스주의를 기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맑스주의의 '청산'을 역설하였습니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는 '개량'의 간판 밑에 맑스주의를 수정하고 자본주의를 비호하였으며 현대 사회민주주의는 '개편'의 이름으로 맑스주의를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복귀시켰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맑스주의는 맑스주의를 '수정'하고 '부정'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완전한 '해체'와 '폐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자본주의 멸망의 불가피성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승리의 필연성에 관한 이론이 구미의 후기 산업사회의 현실에 맞지 않으며 오히려 '부정적 의미'를 주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며 <잉여가치론>은 '노동력의 가치를 착취의 양적 크기로 산술적으로 계산'한 '양적 가치론'으로 그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후기 산업사회는 여러 차례의 경제공황을 수습한 '황금기'의 '복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완전고용'과 '노동력의 탈 상품화', '대중적 부유화'가 실현되어 <잉여가치학설>은 전혀 통하지 않으며 따라서 '폐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맑스주의는 19세기 40년대 유럽의 발전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 기초한 이론이며 경제관계를 위주로 하여 사회역사원리를 전개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반드시 멸망하고 사회주의의 승리는 필연적이라는 것, 노동자계급이 가장 혁명적이고 선진적인 변혁운동의 영도계급이며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지배를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지배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혁명적 입장과 원칙은 노동자계급과 그 당이 시종일관하게 견지하여야 할 혁명적 원칙입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이며 자체의 심각한 모순으로 반드시 망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주의 청산'을 제창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계급의 사회변혁운동에서 견지하여야 할 이러한 혁명적 입장과 원칙을 전면 부정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나: 그러면 이번에는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사회주의 비방과 자본주의의 미화 분식에 대하여 분석해 주시지요.

주: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띠기 때문에 사람들의 개성을 누르고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등을 실현할 수 없게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현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롯한 역사의 반변혁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헐뜯기 위해 항시적으로 써온 상투적 수법입니다.

원래 전체주의는 파쇼국가들에서 발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통치방식으로서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습니다. 지난 날 파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나 파쇼 독일의 히틀러가 바로 '전체주의'를 통치이념으로 하여 파쇼독재를 구축하였으며 이른바 '민족 전체', '국가 전체'를 위해서는 그 어떤 노동운동이나 사회변혁운동도 허용될 수 없다고 공언하면서 근로민중의 초보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적 권리를 말살하고 전대미문의 야수적 폭압통치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인간의 본질적 요구인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입니다. 집단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의 진보성과 우월성을 힘있게 근거지어 줍니다. 집단주의의 기본 요구는 집단의 이익을 우위에 놓고 집단의 이익 속에서 개인의 이익도 참되게 실현해나가는 것입니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이익', '전체의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민중의 이익을 복종, 희생시키고 통치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르조아 개인주의에 기초한 것입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한편 자본주의를 극구 찬양하면서 미화 분식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주로 두 측면에서 즉 후기 산업사회가 고도의 생산력 발전으로 '물질적 번영'을 이룩한 '복지사회'이며 이른바 '민주주의'가 발전한 '민주사회'라고 자본주의를 미화 분식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민중의 '물질적 번영'을 논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생산의 무정부성, 경제파동과 위기, 주기적인 경제적 공황이 필연적인 법칙적 현상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악폐가 급증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로부터 흘러나오는 필연적 귀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산업사회의 '물질적 번영'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적 본질을 가리고 그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려는 자본주의 변호론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또한 후기 산업사회인 구미자본주의 사회가 '민주주의'가 '확장'된 '참 민주사회'로 전변되었다고 극구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미자본주의는 '부르조아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한 '시민사회'로 전변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지난 '산업사회'의 여건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모순적으로 접합'되었지만 오늘의 후기 산업사회, '정보사회'의 여건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2중적 민주화'가 실현됨으로써 '국가 개입의 강화에 의한 자유의 침식'과 같은 '모순'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급진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사회변혁의 '목표'로 제기하고 후기 산업사회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보통 선거제'와 '대의 민주제'를 구현하여 '대중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민주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표방하는 '대중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시민사회'란 부르조아 독재의 반변혁성과 반민중적 성격을 가리며 민중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이며 위장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그 계급적 본질로 하여 광범한 민중에게 민주주의를 실시할 수 없습니다. 만약 광범한 민중의 의사를 수렴하는 정치를 실시하는 '자본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벌써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외면하면서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민중적 민주주의)와의 사이의 계선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결국 부르조아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찬미로 밖에 달리 될 수 없습니다.

나: 포스트 맑스주의는 최근 시기 세계적 판도에서 근로민중의 계급의식, 변혁의식을 마비시키는 최대의 정신적 마약으로 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포스트 맑스주의의 반변혁성이 있다고 봅니다.

주: 그렇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구미자본주의의 '안정적 발전' 운운하면서 계급과 계급투쟁에 관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을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후기 산업사회는 첫째로 '신 중산계급이 양계급(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잔여집단'이 아니라 독자적인 주류를 이루는 계급으로 존재하며, 둘째로 신 중산계급이 벌이는 '신사회 운동'이 노동운동의 '우위'에 섰으며, 셋째로 사회를 이루는 '다원적 주체'들의 '동격연대'가 창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외면하고 구상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허구적 구상의 조작을 전제로 하여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계급대립 중심 모델론'과 '계급투쟁론'은 근거를 상실했으며 온화한 '의회투쟁', '신사회 운동'의 방식으로 사회변혁의 '목표'를 달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포스트 맑스주의는 세계 여러 나라들에 전파되어 민중의 계급의식, 자주의식을 마비시키는 가장 큰 해독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것은 1990년대 초에 소련이 해체된 것을 기화로 '맑스주의 종말'을 부르짖으며 이남에 퍼져 이남 민중의 자주의식을 좀먹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을 가로막는 '사상적 무기'로 반변혁적 지배층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3)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

나: 최근 이남에서는 반변혁적 지배층이 반주사 선전 캠페인을 더욱 강하게 벌이는 한편 우익 개량주의적 사조인 포스트 맑스주의를 사회에 널리 유포시키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이남 민중의 투쟁에 주는 해독적 영향도 자못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의 유포 배경과 그 요인, 이남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먼저 이남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유포 배경과 그 요인에 대하여 논의해 보겠습니다.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관련하여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가 급속히 유포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ㅡ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신봉하던 '이론가', '운동가'들이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사상적 동요를 일으킨 것과 관련됩니다. 동유럽 사태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한 일부 지식인들과 '이론가', '운동가'들 속에서는 사상적 동요가 일어났으며 앞으로의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사상논쟁을 하며 갑론을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논쟁은 크게 보면 첫째 동유럽 사회주의는 붕괴되었지만 맑스ㅡ레닌주의 혁명이론은 유효하며 그것이 가리키는 대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통파'(잡지 [우리의 사상] 그룹에 의해 대표되는 자들), 둘째 맑스ㅡ레닌주의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이른바 '청산파'(잡지 [현실과 과학] 그룹에 의해 대표되는 자들), 셋째 사회민주주의 길이 운동의 진로라고 주장하는 파들(사회민주주의의 '한국적 대안'을 안출해낸 '민중주체 민주주의론'의 제창자들), 넷째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적중한 '한국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이론가들 간의 논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론가', '운동가'들의 사상적 동요와 교조, 사대의 흐름을 타고 포스트 맑스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 사조들이 이남사회에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변혁운동의 주체적 신념이 투철한 민중전위들은 주체사상만이 이남사회변혁의 유일한 지침이며 그 기치 따라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여 민중이 국가와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 되는 참된 민중사회의 건설이 이남사회의 대안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일부 '사상가', '운동가'들은 맑스ㅡ레닌주의에 대한 의혹과 회의에서 벗어나 완성된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따를 대신 저들의 '명분'을 개량주의적 사조인 포스트 맑스주의를 제창하는 것으로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좌절이 '한국 사회변혁운동의 전반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하면서 이 '위기'를 초극하기 위한 '방도'가 포스트 맑스주의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원인이 '맑스주의 위기', '맑스주의의 한계성'에 있다고 하면서 그 '대안'이 사회민주주의냐, 유러코뮤니즘이냐, 자유민주주의냐, 포스트 맑스주의냐 하는 백해무익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일부 '사상가', '운동가'들이 찾았다고 하는 '대안'이 다름 아닌 포스트 맑스주의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실패한 사회민주주의와 유러코뮤니즘을 이남사회의 '대안'으로 들고 나오기는 거북한 것이었고 자유민주주의도 극단한 개인 이기주의에 기초한 반동적 이념으로서의 본색이 드러나 이미 민중 속에서 외면받고 있는 상황에서 포스트 맑스주의가 '새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투항주의적 입장의 반영이었고 자기들의 변절을 가리고 '사상가'로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궁여지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좌절된 것은 현대 수정주의와 그 뒤를 이어 사회주의를 변질시킨 현대 사회민주주의입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좌절은 30여 년간의 기회주의적 정책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적 공산주의의 붕괴는 지금까지의 세계 맑스주의 운동을 결산하고 포스트 맑스주의로 전환하는 결정적 분수령으로 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동유럽 사태와 관련하여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가 급파된 것은 다음으로 민중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식민지통치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미제와 반변혁적 지배층의 책동과 관련됩니다. 최근시기 세계적 판도에서 동서 양극체계가 무너짐에 따라 이남에서 반미자주화와 반파쇼민주화 투쟁이 강화되는 데 불안을 느낀 미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한 편으로는 주체사상의 보급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 편으로 투항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 사조의 최고 변종인 포스트 맑스주의를 널리 부식시키기 위한 '사상공세'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남에서는 반변혁적 지배층의 두둔 하에 1980년대 중엽부터 90년대 초까지 [맑스주의를 개작한다, 헤게모니와 새로운 정치운동],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비롯하여 10여권의 포스트 맑스주의의 원전들이 대대적으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는 이남의 '학술단체 협의회'가 주최한 '현 단계 맑스주의 위기와 진보적 운동'이라는 주제 하에 3차례에 걸쳐 포스트 맑스주의와 관련한 논쟁토론을 잡지 [사회평론](1992. 9/10)에 장황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이남에서는 그 외에 [사회경제평론](1991. 4), [전망](1991. 10호), [철학과 현실](1991. 11), [경제와 사회](1992. 여름, 14호), [동향과 전망](1992. 가을), [말](1992. 1호) 등 모든 사회과학 도서들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학계는 물론 민중운동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었습니다.

최근 반변혁적 지배층은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승격'시키고 비상임의 명목으로 고용한 수많은 '고급 지능인력'가운데 적지 않은 인력을 주체사상을 왜곡말살하기 위한 사상모략책동과 함께 포스트 맑스주의를 유포시키기 위한 책동에 투입하였습니다. 맑스ㅡ레닌주의의 신봉자로 자처하던 PD계열의 일부 비주사파들은 이러한 모략책동에 말려들어 동유럽 사태이후 10여개 분파로 분열 와해되어 오늘은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21세기 진보학생연합'과 같은 일부 잔존세력들은 포스트 맑스주의의 영향 밑에 '자유'와 '성개방'을 부르짖으며 색정음악을 듣거나 반사회적 책동을 하는 '구락부'로 전락되었습니다. 국정원은 학생운동권 내에 포스트 맑스주의를 적극 설교하도록 하는 것과 함께 '한총련 씨말리기 작전'의 일환으로 일부 불순세력들을 학생 운동권에 잠입시켜 '과격투쟁 반대구호'를 들고 '한총련회비 불입금'운동과 '한총련 탈퇴소동'까지 벌이도록 적극 부추겼습니다.

그러므로 이남사회에 퍼진 포스트 맑스주의의 반변혁성과 해독성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철저히 분쇄해버리기 위한 사상전을 힘있게 벌이는 것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나: 이남 사회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유포배경과 그 요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남 사회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에서 반변혁적인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분석 비판해 주었으면 합니다.

주: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 추종자들은 구미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특히 그들은 '두 가지 차원 극복론', '급진적 민주주의론', '복합 주체론', '신사회 운동론', '시민사회론', '시장경제론', '개방론' 등을 강조함으로써 민중의 자주의식,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사회변혁을 위한 민중운동을 개량화에로 유도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 그러한 주장들을 하나씩 비판하고 그 해독성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두 가지 차원 극복론'에 대하여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강원대 교수 이병천을 필두로 하는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지난 시기에는 맑스ㅡ레닌주의를 곧잘 옹호하던 사람들이었지만 동유럽 사태가 발생하자 돌변하여 맑스ㅡ레닌주의의 '패배'를 운운하면서 그 '청산'과 '재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청산주의적, 개량주의적 '근거'를 요약해 보면 맑스ㅡ레닌주의적 유물사관과 정치경제학은 '시효'가 지난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것'이므로 '폐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두 가지 차원 극복론'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를 소급하여 '검토'하여 보면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고 하면서 그 하나는 '주의로서 맑스주의 핵심을 구성하는 역사적 유물론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정치경제학의 차원'이며 '전자에 대하여서는 비판적 극복이, 후자에 대하여서는 비판적 보존과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에는 맑스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도 교활하게 '맑스주의의 모자'를 쓰려는 술책이 숨어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비판극복'한다고 하면서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정치경제학은 '비판, 보존, 전환'한다고 하면서 그 핵인 <잉여가치학설>은 부정하고 다만 상품, 가치와 같은 몇 가지 경제학적 개념들과 '자본주의 경제의 질적 구조'는 '보존,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차원 극복론'의 반변혁성은 첫째로 사변적인 '근거'들로써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의 완전한 '폐기'를 역설하면서 결국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 계급투쟁과 사회변혁에 관한 혁명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인류역사를 생산양식의 교체에 따르는 자연사적 과정으로 본 맑스주의적 이론에는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특징을 보지 못하고 사회역사적 운동을 주체의 주동적 작용으로 보지 못한 근본적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ㅡ레닌주의에 미숙성과 한계성이 있다고 하여 그 혁명적 원칙과 과학적인 이론까지 부정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 자체를 부정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 사상가, 이론가라면 마땅히 그 한계성을 초극하면서 그 혁명적 원칙과 원리들을 전제로 하여 현실이 새롭게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독창적인 원리와 원칙들을 명시하여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체철학은 맑스ㅡ레닌주의의 미숙성과 한계성을 명백히 하면서 그 혁명적 입장과 과학적인 이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사람중심의 독창적인 원리들을 새롭게 밝히고 이론을 전개하고 체계화하면서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과 과학적인 이론들을 자체 속에 포섭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남 사회변혁운동이 '쇠퇴'되게 된 것은 '맑스주의의 사회구성체론의 오류'와 그에 근거한 변혁운동의 '비현실성'에 있다고 하면서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의 '청산'을 운운하며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유물론의 '청산근거'를 '합리주의', '목적론', '진화주의', '경제주의', '기술결정론'이라는 사변적인 논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발전의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순수 논리적'으로 해석한 '합리주의'이며 공산주의라는 '가상적인 이상사회를 목적'으로 전개한 '목적론'이며 인류사회를 5개 생산양식을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 '진화주의'이며 사회발전의 규정적 요인을 '생산력 발전, 기술 발전'에서 찾는 '경제주의, 기술결정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남의 한 필자는 그들을 '속류 맑스주의에 대한 속류 비판과 이병천식 포스트주의의 딜레마'에서 '포스트 맑스주의, 신노선, 신사회 운동 등 겉모습만 달리한 채 급속히 확산되고 세력화되고 있는 투항주의자들'이라고 낙인하였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차원 극복론'의 반동성은 둘째로 <잉여가치학설>을 전면 부정하는 자본주의 미화론이라는 데 있습니다.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에 기초하여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발견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따라 한 편으로는 극소수 자본가들의 수중에 부가 무제한하게 축적되고 다른 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절대적 및 상대적 빈궁화가 촉진되어 자본주의 체제의 고유한 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점유의 자본주의적 성격간의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됨으로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멸망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바로 여기에 잉여가치학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며 인류사에 특기할 발견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구미자본주의의 이른바 '현실'에서 잉여가치학설 부정의 '실천적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구미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주의의 확대, 심화'와 '생산력의 발전 및 구조변화의 귀결'로써 두 번에 걸친 큰 '전환'을 겪었는데 하나는 1960년대 말ㅡ70년대 초까지 '자유민주주의적, 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 포드주의, 포스트 산업자본주의에로의 새로운 전환'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1차 전환'의 결과 구미자본주의는 각종 '위기'와 '동요'를 수습하고 '황금기'의 포드주의적 복지국가자본주의('대량생산과 고임금'이라고 하는 마이크로적 기업관리 방법을 초월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고생산성과 고임금'이라는 미크로적 기업관리 방법)로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차원에서는 공산당까지 시민권을 얻음으로써 '대중적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사회경제차원에서는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 '완전 고용적 경기조정정책' 등에 의해 '노동력의 탈 상품화'가 크게 진전되고 '대중적 부유화'가 실현되어 일차적인 물질적 욕구는 보장되고 생활의 질에 대한 요구가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전환'의 결과 '포스트 산업자본주의화' 즉 서비스 부문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따르는 '서비스 노동자, 지식 노동자의 대중화', '전통적 노동자계급의 상대적, 절대적 축소', '주변노동자의 증대', 자동제어기구의 도입에 의한 노동과정의 '포스트 포드주의에로의 전환', '중앙집권적 단체교섭 형태의 약화, 해체', 자본의 국제화와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의 심화에 따르는 '국민국가 토착기업의 통제력 약화', '노동운동의 약화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현' 등이 중요 내용으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구미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두 번에 걸친 '전환'의 '현실'은 <잉여가치학설>로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것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현 시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적 실업과 빈궁화의 격증, 자본가들의 사치와 부화방탕,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적 반동화, 정신문화 생활에서의 빈궁화가 완전히 외면 내지 묵살되고 있으며 오직 자본주의적 착취와 약탈의 합리화, 자본주의의 반민중성과 부패성의 정당화, 자본주의의 '영원성'에 대한 설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제창하는 구미자본주의의 '현실'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반민중성과 부패성을 보여주는 기본적 특징인 물질생활에서의 기형화, 정신문화 생활에서의 빈궁화, 정치생활에서의 반동화를 소거해버린 현실이 아닌 '현실'이며 그들이 조작해낸 허구적 '현실'일 뿐입니다. 바로 자본주의의 변호, 미화를 위해 이러한 현실 아닌 '현실'의 조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 '두 가지 차원 극복론'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논리'들의 허황성과 그 반변혁성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급진적 민주주의론]은 한마디로 말하여 국가 활동의 기본방식을 왜곡하여 사회변혁의 목표를 부인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이남의 한 포스트 맑스주의자는 "포스트 맑스주의는 포스트 근본주의적인 급진 민주주의이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근대정치의 두개의 원리인 자유와 평등간의 환원 불가능한 모순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 새로운 접합을 추구하는 ……다원적 급진 민주주의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저들의 '궁극적 목표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주의 실현에 있다'느니, '총체적 민주화를 변혁의 목표로 삼는다.'느니 하면서 '급진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이남사회의 '대안'으로까지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창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의 반동성은 첫째로 부르조아지의 의사를 실현하기 위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위장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 준다는 이른바 '만인에 대한 민주주의', '초계급적 민주주의'입니다. 그들은 '급진적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아니고 부르조아 민주주의도 아닌 '새로운 민주주의', '다원화되고 확장된 민주주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가 계급적 성격에 의해 규정되는 '상이한 민주주의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협소한 인식'이며 이러한 이해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의 확장'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는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며 독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계급사회에서 <제3의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아닌 그 어떤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로 밖에 달리는 될 수 없습니다. 근로민중의 의사를 반영하고 그를 실현하는 정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근로민중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정치는 결코 진정한 민주주의로 될 수 없습니다. 역사상에 존재한 착취계급의 '민주주의'는 실제상 근로민중을 기만하고 우롱하기 위한 허위의 민주주의이며 착취계급의 계급적 지배를 가리기 위한 병풍에 불과하였습니다.

오늘 자본주의 나라들과 이남의 기본법에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것이 명문화되어 있지만 그것은 <국가 보안법>과 같은 여러 가지 악법에 의해 사실상 묵살되고 있으며 '문구상 민주주의'일 뿐입니다. 민중이 정권과 생산수단을 장악하지 못한 사회에서 민중의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란 허황한 것이며 민중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기만적 구호에 불과합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의 반변혁성은 둘째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민중민주주의 독재를 부정하기 위한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데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민중민주주의 독재는 사회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배의 무기로서 민중에 대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실제적으로 담보하는 최고 형태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소수 착취계급, 반동계급과 그 잔여 분자들의 반항을 진압함으로써 광범위한 민중에게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보장합니다. 소수 착취계급, 반변혁적 계급에 대한 독재는 국가와 사회의 참다운 주인으로 된 민중의 지위와 역할, 민중민주주의를 담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의 과도기의 '정치적 독재'로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로 '근거'를 상실했으며 '공상적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프랑스 부르조아혁명 시기 쟈코벵파의 '혁명적 독재'에서 그 무슨 '독재를 정당화하는 사고'를 물려받은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부르조아혁명 시기 로베스 피에르를 두목으로 하는 쟈코벵파가 중소 부르조아지와 수공업자, 농민들의 이익을 대표하여 초기에는 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정권을 장악한 후 그 부르조아적 계급적 본질로 하여 반민중적 사회경제 시책을 실시함으로써 도시 주민들과 농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으며 1794년 7월 27일 반변혁세력의 정변에 의해 2년도 못되어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이것이 프랑스 부르조아혁명의 마지막을 장식한 '테르미돌 정변'으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오늘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부르조아 독재인 '쟈코벵적 독재'와 결부시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적인 책동의 일환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의 반변혁성은 셋째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이남 민중에게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주입시키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현대 제국주의자들과 독점 자본가들은 생존의 권리와 자주성을 위한 민중의 투쟁기운이 고양되자 통치수법에서 보다 교활한 방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러 명목의 이른바 '복지정책', '연금자정책' 등 '민주주의 확장 정책'이 그것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책'에 현혹되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계급적 본질과 자본주의 체제의 반민중적 성격을 가려보지 못하고 그것을 극구 찬양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고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미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는 '부르조아지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발전한 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보통 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 노동조합권을 비롯한 결사의 자유 등 시민적 정치적 기본권이 일반화되고 심지어는 반체제적인 공산당까지 시민권을 얻음으로써 정치적 차원에서 대중적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외면하고 '절차상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극구 찬양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기 위한 책동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현대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복귀한 나라들에서 민중이 정치적 무권리와 '폭력'의 희생물로 되고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는 현실은 시장경제와 참다운 민주주의가 부합될 수 없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다운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남사회는 '민주주의 문턱 이전에 있다'는 식의 '비판'을 가하면서 구미의 '확장된 민주주의'를 이남사회의 '대안', '목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구미식 민주주의를 예찬하여도 그 반민중적, 계급적 본질을 가릴 수 없으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민중이 참다운 민주주의적 권리를 향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중시하는 교훈이며 진리입니다.

나: 그러면 이번에는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합주체론'의 반변혁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복합주체론'은 사회적 운동의 주체의 문제를 왜곡하여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과 그 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 계급투쟁을 거부하는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에서 탈피하여 후기 자본주의에서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적 주체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중적 지형 속에서 이들 상호간에 유기적인 민주적 연대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사회적 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을 위주로 하는 '계급주체' 대신에 여러 가지 명목으로 저들의 '요구'를 내세우는 '다양한 주체'를 내세워야 하며 그것도 '동격연대', '민주적 연대'에 기초한 '복합주체'를 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노동자계급의 중심성', 노동자계급과 그 전위당의 영도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 '다양한 중심들’ 간의 '입체적이고 탄력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남의 학계와 운동권의 일부 사람들은 '복합주체론'에 오염되어 이남사회변혁의 주체를 '다원적 주체', '집단적 주체', '복합적 주체' 등으로 표현하면서 '사회적 주체'들의 '독자성'과 그들 상호간의 '민주적 동격연대'를 주장하면서 노동자계급과 그 영도적 역할을 거부하며 사회변혁의 주체적 역량의 강화와 변혁운동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사회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주체'는 사회역사적 운동을 주동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떠밀고 나가는 담당자, 민중을 의미한다는 것을 독창적으로 명시하였습니다. 민중을 떠나서는 사회역사적 운동 그 자체가 있을 수 없으며 사회의 발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중의 구성내용은 각이한 사회발전 단계에서 변화되지만 모든 역사적 단계에서 일관하게 기본을 이루는 것은 근로민중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민중은 노동자계급을 위주로 하여 농민과 근로하는 각계각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민중개념에서 계급적 내용을 삭제해 버리고 '주체'를 단순히 담당자라는 의미로, 민중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매 계급, 계층 그리고 구락부를 비롯한 소집단 등 예컨대 육체노동자, 지식노동자, 주변 노동자, 실업자, 종교 집단, 심지어는 동성연애자 집단, 성, 인종, 민족 등도 불가결한 주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복합주체'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계급과 계층, 사이비 소집단들의 기계적 결합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복합주체'에 상응한 사회적 운동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신사회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복합주체론'의 반동성은 첫째로 그것이 이남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을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후기 산업사회에서 '기술혁명의 지속과 노동과정의 변화'로 '지식 노동자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비중이 높아지고 그들에 의한 사회적 실천의 의의와 역할이 더욱 더 커졌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핵심 주체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느니, 지식인들이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었으므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의 운동과정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사무, 감독, 행정 관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증대되고 상품시장의 '성장'에 따라 판매, 회계,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증대되고 과학기술의 생산적 적용에 따라 기술직, 기능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증대되고 육체적 노동자가 감소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도 육체노동과 노동조건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자본가에게 고용된 <임금 노동자>라는 데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육체 노동자수는 줄어들어도 총체적으로 자본가에게 고용된 임금 노동자수는 증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영도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지위와 역할을 더욱 높일 수 있는 전제로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결코 노동자계급의 영도적 지위를 부정할 '근거'로는 될 수 없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창하는 '복합주체론'의 반동성은 둘째로 이남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론을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변혁운동에서 향도적 역량인 전위당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지 않고서는 사회변혁운동의 승리적 결속에 대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완성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변혁운동과 건설 사업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의 영도를 생명선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복합주체론'의 제창자들은 전위당이론을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전면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근거'의 하나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맑스주의 이론과 현실 노동운동 간의 배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노동자계급만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복합주체'를 영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맑스주의 이론과 현실 노동운동 간의 '배리'란 맑스주의가 공산주의 운동을 주장하는 반면에 현실적인 '일상적 노동운동'은 '공산주의 운동'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운동', '신사회 운동'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 '현실'은 사회적 운동의 주체가 '다원화'되었으므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 '복합주체'의 운동을 영도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운동의 기본은 여전히 노동운동이며 '시민운동', '신사회 운동'은 결코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운동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사회 운동'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그 체제에서의 '개혁운동’이라는 사정과 관련됩니다. '신사회 운동'에서 '사적 소유의 철폐'구호를 드는 예도 있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영화', '공영화'의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남의 '복합주체론'자들은 또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의 영도가 인텔리를 비롯한 여러 계급, 계층의 '특수이해'를 노동자계급에게 '복종'시킬 것만 요구하기 때문에 전위당이론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당이라고 하여 순수 노동자계급의 이익만을 대표한다고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본성과 역사적 사명에 대한 완전한 왜곡입니다. 노동자계급은 온갖 착취와 압박을 청산하고 모든 피착취 근로대중의 해방을 이룩함으로써만 자기의 계급적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급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요구는 사회적 진보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계급, 계층의 요구와 일치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여 투쟁하는 변혁운동의 참모부로서 변혁의 주체에서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창하는 '복합주체론'의 반동성은 셋째로 '신사회 운동' 운운하면서 이남 사회변혁운동에서 계급투쟁을 공공연히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주체'가 '다원화'되어있는 '다원적 사회'에서 사회적 운동의 '기본형식'이 '신사회 운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사회 운동', '시민운동'은 근원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독점체계의 위기관리를 위한 자본주의 개량운동이며 계급적으로는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표한 체제내 개혁운동입니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회의 혁명적 개조보다 이른바 '안정적 발전'과 '점진적 개조'를 지향하며 2중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즉 운동이 국가에 의하여 좌절되면 변혁운동에 편승하며 수용되면 변혁운동에 등을 돌려대기도 합니다.

부르조아 국가가 위기국면에 처할 때마다 중간층을 끌어당기고 '신사회 운동'을 장려하는 '유화정책'을 실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이 운동이 자본주의 '위기관리 정책'에 항거와 협력의 두 입장 사이를 오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신사회 운동'을 경계하면서도 통일전선에 합류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신사회 운동'이 어디까지나 체제내 개혁운동인 것만큼 그것으로써는 이남 사회변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신사회 운동'이 "자율적인 사회적 집단의 정치적 결합에 입각한 생활세계의 민주화와 정치적 권위주의로부터 시민 민주주의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운동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이남 사회변혁의 '전략'으로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급투쟁 대신에 '신사회 운동'을 내세우기 위하여 "노동운동은 하나의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부분운동에 국한되기 때문에 보편적 운동으로서는 가치를 상실했거나 의의가 없어졌다"고 하며 지난 시기 '노동자계급운동 이외의 다양한 비계급운동에 대하여 과소평가'된 결과 '사회적 운동이 위축'되고 '좌절'해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신사회 운동'만을 절대시하면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한 계급투쟁, 변혁투쟁을 부정하는 것은 이남민중의 사회정치적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변혁운동을 전면에서 도전하고 방해하는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나: '복합주체론'의 반변혁성을 구체적으로 분석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민 사회론'의 반변혁성에 대하여 요약해 주었으면 합니다.

주: 일반적으로 '시민 사회론'은 국가형태에 관한 문제를 왜곡하는 것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반변혁적 이론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른바 '시민 사회론'을 들고 나오면서 이남사회변혁의 목표와 수단, 방법을 모호하게 선전하고 자본주의를 찬양,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에 의하면 '시민사회'란 '법적으로 보장되고 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된' 다양한 제도와 집단들로 구성되는 '비국가 영역'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 교회, 학교, 언론기관, 정보전달 기관, 문화 기관,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기구들의 총체가 '시민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대독점가들과 극소수 지배층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국가를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고 시민권을 보장하며 독자적 역할을 수행하는 '민주적 기구로 전환'시켜 '시민사회'에 '해소', '통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대적으로 부르조아지들은 민중투쟁에 의하여 저들의 정권안보에 자그마한 위험이 조성되어도 그를 가차 없이 진압하는 폭압정책을 일삼아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남 민중이 매일 매 시각 당하는 고통입니다. 부르조아국가에 대한 민중의 자그마한 환상도 사회변혁운동에서 금물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시민사회론'을 현 시기 이남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초극'하고 '시민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남사회에는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구상된 '자유민주주의적 시민사회론', '민중주도의 시민사회론', '비판적 시민사회론' 등 잡다한 '시민사회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계급투쟁, 자주성을 위한 투쟁을 거부하고 체제내 개혁만을 주장한다는 개량주의적 성격에서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반변혁적 이론들입니다.

나: 형식만 달리하는 각종 '시민사회론'의 중심적 내용은 무엇인지요?

주: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은 '중산층'이 이남사회의 기본적 역량이라고 하면서 이남사회의 민주적 개혁의 방향은 '중산층'을 중심세력으로 하는 시민운동마당을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남사회의 성격과 계급관계를 왜곡하고 변혁의 목표를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변혁'으로 설정한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민중주도의 시민사회론'은 이남사회 구조 내에 '정치시민사회'를 만들어놓고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상호결합을 중매'하여 '민주주의적 변혁'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을 벌여 '선거'와 '의회'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의 망상입니다. 그것은 현 시기 이남의 식민지 파쇼독재체제의 본질을 간과하고 정치개혁의 기본목표와 수단, 방법을 왜곡하는 개량주의적 견해입니다.

'비판적 시민사회론'은 '다원주의적 민주변혁'을 목표로 삼고 노동운동과 '신사회 운동'을 포괄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운동들의 '동격적 연대'를 실현하는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기 부르조아 정치학에서 내세운 '다원주의론'의 재판에 불과합니다.

나: 그러면 그러한 '시민사회론'의 반변혁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지요?

주: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민사회론'의 반변혁성은 첫째로, 이남사회의 성격을 왜곡함으로써 변혁운동의 목표와 혁명역량의 편성을 모호하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남사회가 식민지적 성격과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남 사회는 미국의 식민지이며 불구 자본주의, 반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남 사회를 '시민사회' 또는 '시민사회가 무르익는 사회'인 것처럼 미화하면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으로서의 이남 사회변혁운동의 성격과 임무를 왜곡하고 '중산층'을 '혁명역량'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변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변혁운동의 주력군의 편성을 저해하고 이남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반대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책동으로 밖에 달리 볼 수 없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창하는 '시민사회론'의 반동성은 둘째로, '의회민주주의'를 제창함으로써 이남사회의 변혁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민대중의 광범위한 조직화를 통해 '선거 사회주의 길'을 열어놓는 데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개량주의적 주장입니다. 이남의 식민지독재통치 하에서는 광범위한 민중이 초보적인 언론, 집회, 결사 등 정치활동의 자유가 말살되고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조직들의 결성과 활동이 가혹한 탄압의 대상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남의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그리고 최근의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행되고 있는 청년학생들의 전위조직인 '한총련'에 대한 탄압, 말살 정책이 그것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민사회론'의 반변혁성은 셋째로,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미화 분식하고 변호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오늘 부르조아지들과 그 사상적 대변자들에 의하여 '인간을 위한 정치', '인격의 존중'과 '자유', '평등'을 원리로 하는 정치로 분석되고 있는 정치이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변혁적 지배층을 제외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적 권리가 유린되고 있는 현실은 '자유민주주의' 정치하에서의 '인격의 존중', '자유', '평등' 구호의 기만성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이남의 '시민사회론'의 제창자들은 인간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 기초하여 사회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시민'이란 '이기적'이며 '본능적 욕구'에 의하여 움직이는 '개인'이며 '시민사회'는 이러한 '시민'들의 '자연 경제적 조직', '개인'들의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곧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근본적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반민중적 성격을 가리고 합리화하기 위한 견해입니다. 극단한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가 이남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남민중 누구나가 체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하여 이남의 한 지식인은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이 사실상 더이상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과 인간운동을 생명이 없고 가치가 없는 사물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정당화하며 오직 법제적 자유의 빈껍데기만으로 온 국민에게 허구적 행복을 느끼도록 장려하고 있을 뿐이다"고 자유민주주의의 반변혁적 본질을 폭로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시장경제론', '개방론'을 주장하면서 시장경제가 '민주주의 확장의 전제'라고 하면서 자본주의를 미화 분식하며 자본의 국제화와 '국민국가 상호간의 의존성의 심화'에 의하여 "새로운 민주사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개방모델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북을 '폐쇄사회'라고 하며 "현재 북한 앞에는……자본주의적 민주변혁 이외의 다른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북을 자본주의적 '개방'에로 유도해야 한다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론의 반변혁성을 요약 분석하였습니다. 민중중심의 과학적인 주체의 변혁론이 명시되고 그에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