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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태어난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김현환 소장 | 2010/01/27 14:40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제14차 총회가 2010 122일과 23일 양일간 뉴저지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나는 이번 총회의 폐회가 선포되자 긴장이 확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잠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 결국 우리는 해내고야 말았다는 안심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난의 행군>을 이북과 이남의 민족운동권만 한 것이 아니라 재미동포전국연합회도 지난 2009년 한 해 동안 <고난의 행군>을 하였다.

우리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회원들의 의리와 동지애와 믿음으로만 생존할 수 있는 조직이다. 우리 조직이 믿을 것이란 동지애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13년간 유지되어 온 동지들 간의 의리와 동지애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동포들과 애환을 함께하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지키면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자는 큰 뜻으로 뭉친 동지들 일부가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고 동지들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약점을 들춰내고 패거리를 지어 조직핵심을 공격하면서 조직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 년 내내 조직을 헐뜯는 이메일이 오고가면서 대다수 회원들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일부 회원들에게 참으로 식상하였다. 조직을 음해하려는 이메일이 올 때마다 우리 조직일꾼들의 등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분노가 솟아오르곤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한해였다.

마침내 무서운 전두환 군사정권에서나 가능했던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일부 회원들이 조직을 2주내에 접수하겠다고 했으나 우리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조직핵심들은 단단히 뭉쳐 비대위에 점령당하지 않고 조직을 지켜내었다.

그리고 이번 뉴저지에서 마침내 성공적인 제 14차 총회를 감격적으로 끝냈다. 14차 총회는 참으로 뜨거운 동지애와 의리로 뭉친 동지들의 단합을 과시하는 모임이었다. 어느 누구도 동지들의 단점을 들춰내는 회원들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조직의 회계가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오히려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일한 일꾼들을 격려하고 자진해서 밀린 회비도 내고 음식 값도 헌금해주는 회원들이 많았다. 심지어 동부지역연합회 회원중에는 지난 몇 년간 마음에 들지 않는 회원들이 동부지역연합회의 간부가 되어 조직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다고 회비를 3년간이나 고의로 내지 않던 회원이 이번에 총회에서 3년치를 한꺼번에 내는 회원도 있었다.

나는 이번 총회기간 중 우리 일꾼들에게 이제야 <동지(Comrade)>라고 마음 놓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동지!>하고 부르니 눈물을 짓는 일꾼도 있었다.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해방감>을 느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흐뭇한 총회를 한 적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새롭게 태어났다. <고난의 행군>을 하고 나서야 가능했다. 14차 총회에 가득했던 뜨거운 동지애와 사랑, 그리고 믿음만이 우리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원들의 유일한 양식이다. 만약 이 양식 이외의 것들을 우리에게 먹이려는 자들은 우리를 식중독시켜 결국 죽이려는 자들이다. 우리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이제 이러한 자들을 더 이상 한명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이북이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이겨내고 <강성대국>을 향하여 달려가듯 우리 재미동포전국연합회도 2009년도의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이겨내고 일심단결된 강력한 조직으로 거듭나 올해에는 반드시 <정전협정>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실천하여 실제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룩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사실상, 이번 총회는 우리 재미동포전국연합회만의 총회가 아니었다. 총회가 끝나고 시작된 시국대토론회에는 문동환 박사, 오인동 박사를 비롯한 6.15의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실제적으로 6.15통합회의를 방불케 하였다.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그 동안 분열되었던 6.15재미위원회도 하나로 통합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통합된 6.15재미위원회를 중심으로 앞으로 미국에서의 통일운동도 한층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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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을 우선적으로
김현환 소장 | 2010/01/27 06:12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1 11 이북 외무성은 <위임>에 따라 6.25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올해 2010년에 <정전협정>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조속히 시작하자고 정전당사국들에 제의하였다.

제안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1950 625일 발발한 코리아전쟁은 사실상 갖 태어난 이북의 사회주의 정권을 조기에 붕괴시키려는 목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또한 1949년 미국이 지원하던 장개석세력이 패하고 모택동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일본을 다시 부흥시켜 동북아에서 일본을 자본주의의 모델로 만들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의도에 따라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만약 갖 태어난 이북의 사회주의정권이 6.25전쟁만 아니었다면 여러 분야에서 급속도로 발전하여 사회주의사회의 발전모델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남의 이승만정권도 곧 붕괴되어 사회주의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며 심지어 패전국 일본도 사회주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최근에 6.25전쟁은 결국 일본을 사회주의화하는 것을 막기위하여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었다고 미국의 해제된 문서에서도 지적되었다.

이북은 1948 99 인민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고 그 이듬해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함으로써 전반적인 사회, 정치, 경제, 문화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이북의 최고지도자와 일꾼들, 그리고 민중들은 변혁적 열의와 창조적 적극성을 발휘하여 짧은 시간내에 사회전반을 발전시켰다.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이북의 이러한 발전 속도가 눈에 가시였다. 이북 사회주의정권의 발전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이남, 일본,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사회주의화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것을 막고 미국내의 실업자문제를 포함한 경제문제도 해결하기 위하여 1950 625일 제국주의연합세력들은 결국 코리아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코리아전쟁 3 동안 평양시는 초토화되었고 일할 만한 이북의 청년들은 전쟁터에서 사망하였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 갔다. 1950 727일 정전협정이 맺어졌으나 그 정전상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북은 폐허된 강토를 다시 개발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짧은 시간내에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면서 이북사회주의정권은 60년 동안 줄기차게 정전체제를 청산하고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온갖 외교적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러는 한편 다시는 코리아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못하도록 핵무기와 미사일을 비롯한 물리적 전쟁억지력을 키워왔다. 코리아반도에서의 <핵문제>란 바로 이러한 전쟁의 일시적 중단상태에 불과한 정전체제의 산물이었다. 만약에 이북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전쟁억제력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코리아반도에서 여러 번 전쟁이 재발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을 막고 코리아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고 이북 사회주의정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도 없이 미국에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번 2010년의 제안은 평화협정체결의 당위성에 대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회담개최에 관한 관련국들의 요구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정책적 의지가 확고하다. 이북의 외무성은

전쟁과 평화라는 본질적이며 근원적인 문제를 떠난 그 어떤 합의도 지금까지와 같은 좌절과 실패의 운명을 면할수 없다.”

선언함으로써 이번 만큼은 반드시 역사적 미결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였다. 이번의 평화협정회담 제안은 이북의 최고수뇌부에 의한 지난 60여년 간의 북미관계에 대한 총결산의 결론에 따른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이북은 미국과 대화를 해보았고 합의서도 여러 번 작성해 보았지만 북미사이의 적대관계의 근원인 전쟁상태를 종식시키지 않는 한 그 어떤 회담도, 커뮤니케도, 합의도 소용이 없었다고 이북은 결론내리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총련에서 발행하고 있는 [조선신보] 125일자의 기사가 그 좋은 예를 잘 지적하고 있듯이 다른 나라들이 다 하고 있는 인공위성을 이북이 쏘아올리자 6자회담 참가국들이 앞장에 서서 그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상정하였다. 그러자 그동안의 비핵화론의와 실천은 살아지고 이북에 경제적 제제가 가해졌다. 이남과 미국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유독 자주독립국가인 이북의 합법적 권리행사만 <군사적 위협>으로 오도하는 교전국 미국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이북은 <제재>에 대한 자위적 조치로서 2차 핵실험을 2009 5월 단행하였다. 이후 북미관계가 대화국면으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언제 또 다시 대결국면으로 돌아갈 지 모른다.

이러한 반복되는 북미관계의 전 과정을 총 결산하고 2010년에는 기필코 교전국 미국과 최후담판을 하겠다는 것이 이북의 확고한 의지이다. 단지 일시 전쟁을 중단한 정전상태에서 미국은 핵을 가져도 되고 이북만 비핵화하라는 것은 이북에 백기를 들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북이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게 되어 근본적으로 전쟁위협이 코리아반도와 동북아에서 살아지게 되면 이북의 비핵화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비핵화는 김주석의 유훈이다. 코리아반도와 동북아에 평화가 깃들이면 이북의 비핵화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이번 이북의 의지는 단호하다. 만약 미국이 또 다시 시간이나 끌며 위에 지적한 근본적 문제를 무시하고 넘어갈 경우 이북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2009년 초에 보여준 것처럼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이다. 대화를 주장하는 오바마정권의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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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의 노을
김현환 소장 | 2010/01/01 20:57

[작성 :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나는 남포 갑문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갔던 평안남도 천리마군에 있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옛날의 강선제강소)를 이번에(2009 1121) 비로소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천리마의 고향, 자력갱생의 고향을 처음 방문하는 나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더구나 지난해 2008 10월에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하여 또 하나의 자력갱생의 모범을 창조한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의 소식을 듣고 감명을 받고 있던 차였기에 더욱 마음이 설렜다.

내가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에 들어서자 3분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정말로 만나고 싶었던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한 노력영웅이며 박사인 리재경 연구사(71)와 부사장 그리고 해설강사 선생 3분이었다. 리재경 박사가 직접 나를 안내하며 기업소의 여기저기를 보여주며 해설해 주었다. 나는 그의 해설을 직접 들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강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자세한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어도 그가 강조하는 자력갱생의 정신,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의 불굴의 의지와 단결력, 그리고 그들의 최고 지도자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 그에 보답하려는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의 충성심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 자체였다.

그의 해설에 의하면 천리마기업소는 처음에 초고석 전기로를 이탈이아에서 수입하려고 했다고 한다. 2 5000만불을 처음에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압력으로 이탈리아의 회사는 값을 계속 올리다가 결국에는 계약을 파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김정일 위원장은 가슴 아파하면서 강선제강소를 현대화 하려면 초고속 전기로를 수입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자체기술로 만들어 내던지 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그는 강선제강소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강선의 노을]이라는 시를 보내주었다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선의 노을

1.노을은 아침저녁 피고지건만

강선의 붉은 노을 언제나 피네.

------어버이 그 사랑

하늘 땅 끝까지 넘쳐 흐르네.

2.만경대 고향집을 곁에 두시고

강선의 로동계급 먼저 찾아주셨네.

-----그날의 그 사랑

아름다운 노을목에 어리어 오네.

3.충성의 마음 담아 끓는 쇠물은

수령님 사랑 속에 노을로 피네.

------어버이 그 사랑

주체시대 노을 속에 영원하리라.

△조선화 ´강선의 저녁노을´ 정영만 인민예술가 작

이 시를 받아 안은 강선의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은 모두 부등켜 안고 울었다 한다. 최고지도자께서 자기들을 믿어주는 그 고마움에 모두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들 강선의 노동계급들과 기술자들은 주석님께서 직접 자신들에게 전후 복구시절에 신심을 불어 넣어주시던 그 음성을 다시 들으며 지금 다시 어서 속히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어 인민경제를 한층 더 발전시키라는 우렁찬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초고속 전기로의 총설계를 맡은 기술자 리재경 선생을 비롯한 과학자들, 기술자들은 <강선의 노을>이라는 시 속에서 울려 나오는 주석님의 우렁찬 음성을 생생하게 들었으며 이 시를 보내준 최고지도자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지혜를 짜내었다고 한다.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의존해 왔던 외국식 사고방식을 버리고 <우리 식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자고 결심하고 설계를 처음부터 새롭게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4개월 만에 우리식의 초고속 전기로를 마침내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어 내자 마자 생산에 들어갔다. 전에 같으면 1년에 걸려 생산할 강철의 양을 1달 만에 생산해내고 전력소모도 1/7로 줄었다 한다. 리재경 박사는 <막상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하고 보니 원리가 어려운 것도 아니더라고요.> 하면서 껄껄 웃었다. 나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라고 칭찬했다. 물론 처음에 리재경 박사와 연구진들이 초고속 전기로를 완성했을 때는 모든 게 완벽하지가 못했다 한다. 그 후도 김책공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의 두뇌들이 계속 강철생산의 시간을 줄이고 전력소비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여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자체의 과학지식과 기술, 자체의 자재로 또 하나의 <자력갱생>의 모범을 창조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은 과학시대에 또 하나의 천리마운동의 시작이었다.

리재경 박사와 다른 안내자들은 기업소를 다 돌아본 후 나를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였다.

리재경 박사는 조용하게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외국에 사시면서 우리나라의 자립경제에 대하여 다는 모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초고속 전기로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존경하는 최고지도자의 인간중심의 위대한 영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려는 단결된 노동계급과 과학자들, 기술자들 대군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력갱생에 기초한 자립경제는 든든합니다. 다른 분들도 모시고 우리 강선을 자주 찾아주십시요.

나는

“천리마의 고향이며 자력갱생의 고향인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방문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기업소의 무궁한 발전을 바랍니다.

앞으로 다른 재미동포들을 모시고 계속 방문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들과 작별하였다.

나는 리재경 박사가 강선의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연구한 강선공장대학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이북의 교육제도의 위대성을 새삼 재고하게 되었다. 군대에서나 공장에서나 농촌에서나 광산에서나 자기만 능력있으면 다 공부할 수 있고 생산현장에서 뛰어난 인재가 발견되면 언제고 대학으로 추천되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이북의 교육제도와 사회제도가 나는 사실상 부러웠다. 각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이나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 나이에 상관없이 이과대학이나 김책공대로 보내져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여 이십대 박사들이 계속 배출되게 하는 이북의 교육제도가 오늘날 어떤 결실을 가져왔는가? 사실상 앞에서 견학한 강선의 초고속 전기로 완성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현대과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위성발사를 자체의 과학기술과 자체의 자재로 두번이나 발사하여 성공한 일이라든가 핵실험도 두 번이나 성공한 비결은 결국 이북의 주체교육의 결실이 아니었던가! 제국주의의 압력으로 다른 발전된 나라들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를 쳐다보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첨단과학들을 배워 스스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며 오히려 선진국들보다 앞서나가는 이북의 자력갱생의 과학자들, 기술자들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세계 최강의 미국이 조그마한 나라인 이북과 사실상 전쟁을 포기하고 대화로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그마한 나라인 이북이 세계앞에서 유엔안보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유엔개혁을 외치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천리마의 고향, 자력갱생의 고향인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떠나면서 내가 코리안이라는 민족적 긍지감을 다시 새삼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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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관의 정립
김현환 소장 | 2009/11/01 14:01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인류 사상사의 첫 시기에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해명하기 위하여 부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세계인가 하는 문제였다. 참으로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인류의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살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 <세계관>은 바로 우리의 <인생관> <사회역사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고 언론 출판 사업이 활발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세계를 신비스럽게 보았다. 옛날 사람들이 사는 곳 마다 신의 이름은 달랐어도 그들은 신을 믿었고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5,000년 전에 생겨난 고등종교들도 신이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결국 인류는 오래 동안 시원의 견지에서,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 졌느냐, <의식>, <정신>으로 이루어 졌느냐, <물질>로 이루어 졌느냐 하는 견지에서 세계를 관찰해 왔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대국이라는 미국도 기독교 국가로 자처하면서 모든 국가행사가 기독교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돈, 달러에도 In God We Trust(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씌어져 있다. 미국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결국 시원의 견지에서 세계는 신이 창조했으며 신이 세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장 과학적인 미국도 관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조국 남반부를 보면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여년 만에 기독교의 총인구가 1,000만을 넘어섰다고 하니 기독교의 신이 인간을 비롯한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는 관념론자들이 총인구의 4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는 통계이다. 여기다 신을 믿는 다른 종교인들의 수를 합하면 아마 관념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총인구의 반은 넘지 않나 생각된다.

한편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우리 조국의 북반부는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물질로 스스로 존재했으며 인간마저도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라고 믿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이북의 주민들 대부분은 신을 믿고 있지 않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처럼 세계를 시원의 견지에서 신, 정신, 의식으로 볼 것이냐, 물질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미개한 원시시대부터 첨단과학기술이 발달된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토론되어 왔다. 여기서 그동안 철학사에서 사용되어 온 철학적 용어들을 빌려 이 세계관과 연관된 문제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유물론, 관념론, 변증법, 형이상학

그 동안 철학사에서는 오래 동안 유물론과 관념론이 논쟁을 벌려 왔고 또한 변증법과 형이상학이 논쟁을 벌려 왔다. <유물론>이란 세계의 물질성을 인정하는 학설, 의식(정신)에 대해서 물질이 일차라고 주장하는 철학학설이다. <관념론>이란 이와는 반대로 세계는 본질에서 관념이요, 정신이라고 보는 철학학설이다. <변증법>이란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고 보는 철학학설이다. <형이상학>이란 이와는 반대로 세계란 본질상 변화발전하지 않고 기껏해야 순환운동을 한다고 믿는 철학학설이다.

이 두 진영의 논쟁이 오래 동안 계속되어 오다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에 의해서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극복이 이루어졌고,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의해서 형이상학에 대한 변증법의 극복이 이루어졌다고 철학사는 지적하고 있다. 즉 유물론에 의해서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증되었고, 또 세계가 형이상학이 주장하듯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증법의 주장처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해명되었다. 이것은 세계를 물질로 보는 유물론이 관념론에 대해서 승리하고, 세계의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발전하고 부단히 운동한다고 보는 변증법이 형이상학에 대해서 승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위에서 이미 지적한대로 아직도 많은 나라들에서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조류들과 종교 사상들이 존재하지만 총체적으로 <세계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부단히 운동,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 일반적 상식으로 되었다. 따라서 세계의 시원문제, 세계가 물질이냐, 의식(정신)이냐, 또 세계가 변화 발전하느냐, 변화발전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들을 둘러싼 유물론과 관념론의 논쟁, 또 변증법과 형이상학의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일단 결론 내려 졌다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오래 동안 인류의 생각 속에는 유물론과 변증법은 과학적인 철학이요, 관념론과 형이상학은 비과학적인 철학이라는 고정된 관념이 정착되었다. 또한 이 유물변증법과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철학에서 진보성과 반동성의 기본척도로도 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 왔다. 이 대립적인 양자를 철학에서 진보성과 반동성의 기준으로 보게 된 것은 역사발전에서 선진적 계급은 언제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보며 반동적 계급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현존체제를 유지보존하기 위하여 현실적 여러 관계와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을 왜곡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이론적 분석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철학의 당파성은 벌써 인식론의 문제를 초월하고 있다. 즉 과학적인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자주성의 실현을 억제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철학,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설교하는 철학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실용주의철학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신을 믿는 비과학적인 관념론적인 종교철학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민중 신학과 해방신학이 그 좋은 예이다. 이것은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문제를 전제로 그것을 자체 속에 포섭하면서도 더 고차원적인 문제에 의해서만 철학의 당파성, 진보성과 반동성이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철학 자체가 창조적 성격을 가진 철학이기 때문에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철학도 끊임없이 변화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난 시대와는 다르게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세계의 무대에 주인으로 등장한 새로운 시대이고 민중의 자주적, 창조적, 의식적 활동에 의해서 역사가 개척되어 나가는 아주 새로운 시대, <자주시대>이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생산력이 급속히 발전되어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의 영역이 급속히 확장되어 나가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조절, 통제능력도 비상히 커졌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을 제쳐 놓고, <인간>이라는 요인을 하나의 독립적인 요인으로가 아니라 그 요인 자체를 <물질과 의식>으로 갈라놓고, <육체와 정신>으로 갈라놓고서는 인간의 주인 된 지위에서 인간의 역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우리 시대의 여러 현상들, 과정들, 사건들에 관하여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유물론철학도 더욱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철학으로 발전해야 된다는 것이 이 시대의 필연적 요구로 나서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유물론이란 <세계의 시원이 무엇이냐>하는 견지에서 세계의 본질을 해석한 것이었다. <세계의 시원이 물질이다>라는 데로부터 <물질>을 세계의 시원의 위치에 놓고 세계의 본질을 밝힌 것이 지금까지의 유물론이었다. 그러나 세계가 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조건에서는 어떻게 해야 유물론철학도 더욱 더 발전해 나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나서게 되었다. 세계가 물질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조건에서 유물론을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려면 바로 세계의 시원이 무엇이냐 하는 견지에서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 했던 <철학의 근본문제>부터 혁신해야 한다.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

그러니까 세계의 시원의 문제가 해결된 조건에서 세계의 시원의 문제를 근본문제로 했던 철학의 발전단계로부터 보다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근본문제> 자체도 새롭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여기서 <철학의 근본문제>란 철학의 다른 모든 문제를 푸는 데서 사상 이론적 및 방법론적 기초로 되는 문제를 말한다. 즉 철학의 성격과 내용, 근본특징을 규정하는 문제를 말한다.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마르크스주의철학은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문제>가 세계의 시원을 밝히는 문제로서 그 해명이 세계관을 세우는 데서 이론적 출발점으로 되고 물질과 의식의 범주가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범주이며 따라서 그 상호관계는 세계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일반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이 유물론과 관념론을 가르는 기준으로도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의해서 세계가 물질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조건에서, 즉 세계의 시원문제가 해결된 조건에서 <그러면 이 물질세계에서 누가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결정적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로 내세워야 한다. 이 문제에 해답을 주는 원리가 새로이 발전된 유물론의 근본원리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은 바로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사상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문제>라고 표현할 때는 이 관계문제를 어디까지나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로 추상한 것이다.

사실상 인간이 현실세계와 맺는 관계는 매우 다양하다. 인간은 주위의 현실세계와 정치적 관계, 경제적 관계, 문화적 관계, 도덕적 관계, 미학적 관계, 사상적 관계, 인식적 관계, 실천적 관계, 가치적 관계 등 수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 주체사상이 <철학의 근본문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라고 표현할 때 위에 말한 모든 복잡한 관계를 다 철학의 근본문제로 본다는 의미인가? 그런 뜻이 아니다. 주체사상은 인간과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들을 다 <지위와 역할>이라는 문제로 과학적으로 추상했다. 현실세계와 맺고 있는 인간의 이론적 관계에서나, 실천적 관계에서나, 가치적 관계에서나 인간의 <지위>가 어떠한가, 인간의 <역할>이 어떠한가, 이러한 관계들에서 인간이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는가 못하는가, 이러한 관계들을 인간이 <개조하는 역할>을 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와 맺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든 다양한 관계를 <인간의 지위와 역할>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적으로 추상한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이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는 결코 단순히 <인간문제>, <인생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라는 점이다. 다시 풀어 말하면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냐, 아니면 주위 세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주인이냐, 또한 인간이 세계를 개조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세계가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가 왜 철학의 근본문제로 될 수 있는가?

첫째로,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의 문제>가 세계관의 사상 이론적 및 방법론적 기초로 되기 때문이다. 사상적 기초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간의 근본 요구와 이해관계는 세계의 지배자, 개조자 그리고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어 자기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려는 데서 표현되며, 이론적 기초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이며 일반적인 관계가 <세계와 인간의 관계문제>이며 그것에 의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이 과학적으로 해명된다는 것이다. 방법론적 기초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계를 누구의 이익의 견지에서 보는가, 무엇을 기본으로 하여 세계의 변화발전에 대하는가 하는 것은 세계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주동적 역할을 하는 것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달려 있다.

둘째로, 그것은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힐 수 있게 설정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올바로 규명할 때 인간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냐, 아니면 외적인 힘에 종속되어 있느냐, 인간이 자기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그 철학의 진보성과 반동성도 명백히 규정될 수 있다.

주체사상이 유물론을 새롭게 발전시킨 내용

이처럼 주체사상이 내세운 새로운 철학의 근본문제는 결코 지금까지 오래 동안 유물론과 관념론이 논쟁을 벌려온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철학도 더욱 새롭게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면 주체사상이 유물론철학을 새롭게 발전시킨 주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첫째로, 주체사상은 <물질의 개념>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물질개념>은 유물론철학의 출발범주, 출발개념이다. <물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유물론과 관념론이 갈라진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이라는 책에서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주어져 있으며 그것에 의하여 복사되고 모사되고 촬영되는 객관적 실체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즉 레닌은 <물질>을 인간의 의식밖에 그것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로 보았다. 이 레닌의 물질에 대한 정의는 철학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보지 않고 관념의 세계로 보는 관념론자들이 <물질>을 관념의 산물로, 정신의 산물로, 이념의 산물로 보았는데 그러한 관념론적 이해를 극복하는 데서는 레닌의 물질에 대한 정의가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이 정의는 지금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물질에 대한 레닌의 정의를 깊이 있게 분석해 보면 이 정의가 더 발전되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질을 <객관적 실체>로 볼 때 이 <객관적 실체성>이라는 정의는 물질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물질발전의 <각이한 형태>에 따라서 변화되는 성질이 아니라, 그것은 물질의 어떠한 역사적 발전단계나 물질의 어떤 형태에 상관없이 다같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 속성>이다. 이 레닌의 물질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무기물질이나, 생명물질이나,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이나 모두 <객관적 실체>라는 면에서는 다 공통적이다. 물질의 역사적 발전이 어떠했든지 간에 <객관적 실체성>은 어디서나 같다. 그러므로 이 물질에 대한 철학적 개념이 더욱 더 발전하려면 그 개념을 가지고 물질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물질의 각이한 형태를 분석할 수 있는 인식론적 기능과 방법론적 역할이 더 높은 개념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이 물질의 개념이 물질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성질, 측면, 계기를 <물질>이라는 개념의 징표 속에 담아야 한다. 레닌의 물질개념은 바로 물질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부단히 발전하는 속성, 측면, 계기들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

다음으로 물질이란 유물론철학의 출발개념이기 때문에 유물론과 변증법이 참답게 결합되려면 이 유물론철학의 출발개념인 <물질개념>과 변증법철학의 출발개념인 <운동개념>이 결합되어야 한다. 지난 시기 <객관적 실체성>을 물질의 유일한 징표로 보는 물질개념은 운동개념과 결합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물질개념이 참으로 유물론적 개념과 동시에 참으로 변증법적 개념으로 되려면 물질개념이 더욱 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심화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지난 시기의 물질개념은 가장 발전된 물질인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속성들을 직접 염두에 두지 않고 주로 저급한 물질에 있는 속성들을 염두에 두면서 물질개념을 연구하였다. 인간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이 인간에게서 물질의 본질적 특성이 가장 전형적으로,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물질개념도 더욱 더 완성되려면 물질의 특성이 가장 성숙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이라는 고급한 물질적 존재를 깊이 있게 분석하여 정의를 내려야 한다.

주체사상은 이러한 위에 지적한 요인들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물질>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정의를 내렸다.

“어떠한 물질이나 다 일정한 구조와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속성에 따라 운동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정식화라고 볼 수 있다.

각이한 물질발전의 단계, 또 물질의 각이한 형태들이 <객관적 실체성>의 면에서는 다 같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작용의 면, 운동에서는 다 차이를 가진다. 외부세계에 얼마나 주동적으로 작용하느냐, 그 운동이 얼마나 고급하고 복잡한 운동이냐 하는 데서는 물질형태나 물질발전의 단계마다 다 다르다. 무기물질이나 생명물질은 외부세계에 대한 주동적 작용, 능동적 운동의 특성으로 볼 때 단순성, 저급성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 이르면 외부세계에 대한 주동적이며 능동적인 작용이 고도로 발전한다. 인간은 무기물질이나 생명물질에 비해서 가장 복잡하고 고급한 운동, <사회적 운동>을 한다. 그러니까 물질이 낮은 단계로 부터 높은 단계로 발전할수록 외부세계에 대한 능동적 작용, 주동적 작용이 더욱 더 강화되고 보다 고급하고 복잡한 운동을 한다.

그러면 외부세계에 대한 물질의 각이한 형태들의 작용의 주동성과 능동성, 운동의 고급하고 복잡한 성격은 무엇에 의해 규제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물질의 속성>에 의해서 규제된다. 생명물질이 외부세계에 순응, 적응하는 활동을 하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속성>때문이다. 생물학적 생명은 개체를 보존하고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환경에 더 잘 순응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물질의 <개체 보존과 종 보존의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자주성> <창조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가장 복잡하고 고급한 운동을 한다.

그러면 이러한 <속성>은 무엇에 의해 규제되느냐?

그것은 바로 그 사물의 <구조>에 의해서 규정된다. 모든 사물은 다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각 사물은 일정한 방식으로 일정한 구성요소들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 <구성요소들의 결합방식>이 바로 <구조>이다. 바로 이 구조에 의해서 모든 사물의 <고유한 속성>이 나오고 이 속성에 따라서 각 사물은 그 속성의 특성에 맞게 <운동>한다. 전기적 속성을 가진 물질은 전기적 운동을 하고, 자기적 속성을 가진 물질은 자기적 운동을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는 그것의 구조 자체, 사회관계 자체, 사회의 정치적 관계, 경제적 관계 자체로부터 제국주의는 다른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약탈, 침략을 일삼는 근본속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제국주의는 침략전쟁, 약탈 전쟁이라는 행동을 벌리게 된다. 한편 사회주의는 사회적 구조, 즉 사회의 정치관계, 경제관계 자체로부터 사회주의는 상호 협조하고 협력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대외활동에서도 자주, 친선, 평화의 정책을 쓰게 된다.

이처럼 어떠한 물질의 형태에서나 일정한 <구조> <속성>이 있고 그 <속성>에 따라서 <운동>이 진행된다. 그리고 물질이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구조가 더욱 더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덜 유기적인 것으로부터 보다 더 유기적인 구조로 변한다. 이에 따라서 속성도 단순한 속성으로부터 보다 복잡한 속성으로, 저급한 속성으로부터 보다 고급한 속성으로 발전한다. 그에 따라서 운동도 단순하고 저급한 운동으로부터 복잡하고 고급한 운동으로 발전한다. 그러니까 사물의 <구조>, <속성>, <운동>, 이 세 가지 징표는 물질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더욱 더 발전된다. 이러한 요인들을 고려하여 위에 지적한 주체사상의 물질개념이 정립되었다.

이처럼 주체사상의 물질개념은 <물질>이라는 개념을 변증법의 기초개념인 <운동>이라는 개념과 결합시켰다. 또한 주체사상의 물질개념은 가장 고급하고 발전된 존재인 인간의 속성, 성질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왜 인간만이 외부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을 하느냐? 왜 사람만이 환경에 단순히 순응만 하지 않고 환경자체를 자기에게 복종시켜 나가느냐?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주성과 창조성이라는 가장 발전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체사상은 밝혀주었다.

그러면 왜 인간만이 <자주성> <창조성>을 가지는가?

인간 아래의 단계에서는 자주성과 창조성을 낳을 수 있는 그러한 <구조>, 그러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구조를 갖고 있고 <사회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사회관계와 다른 생명물질들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외부세계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동물적 존재와 차이가 없게 된다. 인간집단은 동물처럼 자연이 주는 것만을 섭취하는 것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부득불 환경을 개조해야 한다. 그래야 가장 발전된 물질에 상응한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집단의 <사회관계> 자체가 자주적 특성, <자주성>과 창조적 특성, <창조성>을 가지게 된다. 동물이 <생물학적 본능>에 의해서 행동이 규정된다면 인간은 <사회적 요구> <이해관계>에 의해서 행동이 규정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인간의 <의식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집단 속에서 맺어지는 이러한 <구조> 자체로부터 인간 이하의 동물들의 구조와는 질적으로 다른 구조, <사회적 구조>가 생겨나며, 이러한 사회적 구조로부터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사상의 새로운 시각에 기초해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의 <속성> <운동>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주체사상이 변증법을 새롭게 발전시킨 내용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은 물질의 <발전수준>, <발전형태>에는 관계없이 모든 사물에 공통한 <운동발전의 일반적 특성>을 해명하는데 머물렀다. 따라서 지난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을 가지고는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한 운동의 특성을 밝힐 수 없었다. 주체사상은 처음으로 인간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운동>을 한다고 밝혔다. 가장 고급한 물질인 인간의 발전된 운동이 바로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운동이라는 명제를 주체사상이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물질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다음으로, 세계의 변화발전이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주체사상은 밝혔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은 인간도 하나의 물질운동의 한 형태로 보는데 머물렀기 때문에 그것은 세계의 발전에서 인간이 노는 역할에 관한 문제를 특수한 철학적 문제로 내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가 이 세상에 나타난 후 인간이 점차 세계의 발전을 자기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발전을 주관하는 <주체>의 문제가 나서게 되었다. 지금 자연 그 자체에 의한 자연발생적 변화보다도 인간의 주동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에 의한 자연의 변화비중이 더욱 더 높아져 가는 추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사상은 세계가 <인간을 중심>으로 개조 발전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난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은 <주체가 없는 변증법>이었다. 한편 주체사상이 밝힌 변증법은 <주체가 있는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주체사상은 주체가 있는 변증법, 즉 사람의 목적의식적인 역할에 의해 변화 발전하는 변증법까지 밝혀줌으로써 변증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었다.

또한 주체사상은 세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겠는가 하는 문제에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즉 주체사상은 인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세계발전의 방향과 양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었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모든 사물이 다 자체의 원인에 의해서 변화발전하기 때문에 <세계의 통일적 발전방향>이라는 문제가 올바로 설 수가 없었다. 주체사상은 인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세계의 발전이 더욱 더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밝혀주었다.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해 나가는 방향으로 세계가 발전해 나가는 것이 세계발전의 방향이다. 그러면 어떠한 양상을 띠고 세계가 발전되어 나가는가? 세계의 발전은 더욱 더 넓은 세계의 영역이 보다 빠른 속도로 인간의 지배와 통제 밑에 들어오는 그러한 양상을 띠고 이루어지고 있다.

<의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

또한 주체사상은 <의식>에 대한 이론도 새롭게 심화시켜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철학은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식>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의식> <물질의 반영, 즉 객관세계의 반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의식의 본질을 물질세계, 즉 객관세계에서 찾았다. 이 경우 의식의 원천은 물질세계, 즉 객관세계에 있다. 물론 이 이론은 <의식>을 신비화하고 의식의 물질적 기초를 부정하고, 의식을 절대화하는 <관념론>을 반대하는 데서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선 의식이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동물들도 감각, 지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개념과 판단, 추리라는 것을 동물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동물의 감각, 지각은 의식발전의 낮은 단계를 표현할 뿐이다. <의식>이라고 말할 때는 감각으로 출발해서 개념, 판단, 추리에 이르기까지 전일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의 본질은 마땅히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의식의 본질을 논해야 의식에 대한 보다 높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강조하듯 객관세계를 정확히 반영해 가지고 객관세계의 특성에 맞게 활동해야만 행동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객관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행동의 성과를 거두기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된다.

그런데 인간은 객관세계의 법칙대로 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객관세계의 법칙의 작용도 자기에게 복종시키겠는가 하는 견지에서 활동한다. 인간은 객관세계를 복종시키기 위하여 객관세계를 자기의 요구에 맞게 개조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활동에서 <의식>이 노는 역할의 견지에서 볼 때 <의식>이라는 현상을 단순히 <객관세계를 복사, 모사, 촬영하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의식의 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요구> <이해관계>에 맞도록 활동한다. 인간은 객관세계가 하라는 대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요구와 이해관계에 맞게 객관세계를 자기에게 복무시키기 위하여 활동한다. 이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고 지휘하는 것이 의식이다. 따라서 의식의 본질을 올바로 밝히자면 인간과의 관계에서 의식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객관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복사해서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맞게 두뇌 속에 들어 온 형상도 개작하고 변형하여 앞으로 자기의 행동의 결과를 미리 예상하면서 행동의 목적을 세워 활동한다. 따라서 의식의 본질을 역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주체사상은 의식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내리고 있다.

“의식이 물질세계의 반영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의식의 본질을 거기서 찾는 것은 일면적이다. 의식의 본질은 객관세계의 반영이라는 데서보다도 <인간생명의 중심인 뇌수가 인간의 활동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외부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기초해서 외부세계에 대하여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의식이라는 것은 주체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활동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란 인간의 속성이다. 따라서 의식의 본질을 <객관세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에서 찾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듯 의식의 본질을 <객관세계의 반영>이라는 데서 찾는다면 그 본질이 객관세계에 있는 것으로 된다. 물론 의식이 객관세계의 반영이라는 것은 의식의 한 측면을 말해주며 그 자체는 진리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반영론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의 본질을 거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활동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뇌수의 기능>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의식에 대한 이해가 인간을 중심으로 더욱 더 발전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주체사상에서는 의식을 <사물의 본질과 합법칙성을 반영한 의식형태>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식형태>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를 <지식>이라고 말하고, 후자를 <사상의식>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주체사상에서는 의식을 <지식으로서의 의식> <사상의식으로서의 의식>, 두 가지 의식형태로 구별하여 쓰고 있다. 이처럼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도 주체철학은 과학적인 해답을 주었다.

이와 같이 주체사상은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명시한데 기초하여 인간을 위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사물현상들의 공통성>을 밝히고 그에 기초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를 밝힌 유물변증법적 이해와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이것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혀야 할 세계관의 사명에 맞게 세계에 대한 견해가 밝혀졌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도 바로 이것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앞에서 다룬 세계에 대한 유물변증법적 견해를 발전시킨 내용들은 <주체적 세계관>의 기본내용을 이룰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이미 강조했듯이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해명하고 인간을 위주로 하여 인간에 의한 세계의 지배와 개조발전의 합법칙성을 밝힌 바로 여기에 세계에 대한 주체적 견해의 주되는 내용이 있으며 독창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시대의 발전은 세계관의 발전을 동반한다.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회변혁운동의 끊임없는 확대발전은 이제까지 역사의 대상으로 취급되어 온 근로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한 새로운 시대, <자주시대>를 탄생시켰다. 근로민중이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역량으로 등장한 새 시대인 <자주시대>는 그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개척하며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역사적 사명을 승리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요구하였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던 시기의 시대적 요청은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설교하던 <반동적 세계관>을 타파하고 자본주의의 멸망의 불가피성과 사회주의의 승리의 필연성을 신념으로 심어줄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봉건의 잔재이면서 지배계급에 의해 악용되고 있던 <신중심의 세계관> <절대이념>을 내세우는 <객관적 관념론적 세계관>과 고립된 <자아>를 내세우는 <주관 관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유물변증법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앞에서 이미 길게 밝혔듯이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명을 토대로 하여 그 토대 위에서만 정립될 수 있었다. 물질-의식문제의 과학적 해결위에서 역사발전의 주재자는 <> <절대이념> <자아>도 아니라 물질의 <생산양식>이며 역사는 생산양식의 교체의 역사이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점유의 사적 성격간의 모순,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하여 자연사적으로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의식>이 객관적 필연성을 반영할 뿐 아니라 객관세계를 정확히 반영한 의식은 거기에 능동적으로 반작용한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이러한 이론이 민중에게 파악되면 거대한 물리적 힘으로 변화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를 기본 틀로 하여 전개되고 물질적 생산양식을 역사의 주재자로 본 마르크스주의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대로 나아갈 수 없었으며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해명할 수가 없었다. 민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역사와 자기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새 시대, <자주시대>의 요청은 위에서 길게 설명했듯이 <세계와 인간의 관계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명에 기초하여서만 해결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체사상에 의하여 세계에 대한 주체적 관점과 입장이 확립됨으로써 세계관의 구성체계가 올바로 밝혀지고 세계관이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히는 자기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히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세계관의 시각에서 볼 때 세계관은 마땅히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해야 한다. 즉 사회적 인간의 본성적 요구인 인간의 <자주적 요구와 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사물을 보고 평가하며 인간의 <자주성의 실현>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관점과 입장이야말로 세계의 지배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고수하고 세계를 인간을 위한 세계로 개조하기 위한 인간의 창조적 역할을 확고히 담보하는 관점과 입장이다. 이처럼 인간을 위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와 관점과 입장을 밝힘으로써 <주체의 세계관>은 지난 시기의 철학적 세계관의 일면성을 극복하고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운명문제에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해명을 준 철학적 세계관으로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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